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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취임 100일 맞은 이정미 헌법재판관

    "예상치 못했던 헌법재판관… 주목 받는 게 부담스러워"

    정수정 기자 suall@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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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미(李貞美·49·사진)헌법재판관은 최초의 40대 재판관이자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어 비(非)서울대 출신에 여성 재판관이라는 이유로 먼저 주목을 받았다.

    헌법재판관은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가 충돌할 때 헌법을 기초로 분쟁을 해결해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동안 다양한 가치를 대변해야 하는 헌법재판관 9명은 대부분 남성이자 서울대 출신이었다.

    법률신문은 지난 6월22일 헌법재판소 청사에서 사회의 시선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재판관을 만났다. 이정미 헌법재판관은 취임한 지 100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언론이나 사회에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소신 있게 헌법재판관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취임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났어요.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고 아직까지도 적응을 해가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과, 헌법재판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생각하면 아직도 부담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이 재판관의 학창시절 꿈은 수학선생님이었다. 수학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좋아했다. 하지만 1979년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를 앞두고 10·26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고등학교 시절 항상 적어냈던 장래 희망이 바뀌었다.

    "집 근처에서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저나 친구들은 다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사회 모습에 혼란스러워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떤 방향이 사회가 올바로 가는 길일까 생각하다가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입시를 목전에 두고 진로를 바꾼 이 재판관은 1980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하자 마자 휴교령이 내려져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는 못했다. 대학생활은 시위 등으로 어수선했다. 또 여학생이 워낙 소수라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는 여학교를 다녔는데 대학에 들어갔더니 여자 동기가 딱 4명이었어요. 입학했을 때는 고시실에서 여학생도 안 받아줬어요. 40명 정도가 밀폐된 공간에서 하루종일 같이 생활해야 하는데 여학생이 소수이고 고시실에 있으면 다수 남학생들이 불편할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 제가 졸업할 무렵에 개방이 돼서 고시실에 들어갔습니다."

    이 재판관이 198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도 합격자 중 여성은 5명이었다. 그 중 3명이 1987년 법관으로 함께 임관됐다.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을 맡고 있는 박보영 변호사와 윤영미 고려대 교수가 사법연수원 16기 동기생들이다.

    처음 이 재판관이 하고 싶었던 일은 검사였다.

    "당시 여성 사법시험 합격자는 소수였기 때문에 사법시험에 붙으면 신문에 나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도 인터뷰를 했는데 검사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그런데 검찰시보를 해보니 저랑은 안 맞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1987년 이 재판관은 검찰이 아닌 대전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판사가 된 뒤 서른을 넘겨 결혼을 했고 지금은 중학생 자녀 둘을 둔 엄마이기도 하다.

    "늘 보따리를 들고 다니고 애들이 자면 이후에 일을 하고 아니면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했어요. 잠은 짬짬이 잤죠. 여성이 소수이다 보니까 조금만 일에 소홀해도 눈에 띄어요. 그게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여성법조인에 대한 평가가 될까 봐 조심스러웠어요. 선배들도 다 같은 마음으로 일을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지금은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환경이나 시설이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친척이나 가족이 아니고서는 아이들을 마음놓고 맡길 수 없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친척 등 육아를 도와주는 분이 없어서 다른 사람 손에 의존했는데 그 과정에서 애들도 많이 힘들어했어요. 당시에는 어린이집에 들어가려고 해도 1년 이상 대기를 해야 했고요."

    지금은 아이들이 중학생이 돼서 예전보다 엄마 손을 덜 필요로 하지만 그래도 매일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래도 이 재판관은 아이들 양육 문제에 고민이 많을 여성 후배 법조인들에게 세월이 참 빨리 흘러간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한두 가지 정도 취미 생활도 하고 일도 즐겁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렇게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2010년도에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인사발령이 났다. 고등부장 발령이 난 직후에도 이 재판관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고등부장이 드문 상황에서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외부 활동을 거의 안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외부 활동을 안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일이 정말 많았어요. 재판 당사자는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 항상 재판이 최우선이었고 또 애들한테도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게 너무 벅찼어요. 지금도 제 딸은 엄마랑 이거 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 하고 요구가 많아요. 같이 못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미안함이 있습니다."

    부산고법에 이어 지난해 8월에는 대전고법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나 지난 1월 이공현 전 헌법재판관의 후임 재판관으로 내정됐다. 전효숙 전 헌법재판관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자 비서울대, 40대 재판관이란 타이틀로 먼저 주목받았다.

    "많이 부담스러웠고 지금도 부담이 됩니다. 헌재는 판사로 있을 때보다 언론에 노출이 더 많이 되는데 게다가 저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을 받게 돼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이 재판관이 내정되기 전에는 연수원 동기인 윤영미 교수가 내정됐다는 오보가 나기도 했다.

    "윤 교수가 단독판사를 하다 그만뒀는데 헌재에서도 일을 했고 정말 훌륭한 분이라 제가 기사를 보고 축하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그 뒤에 오보라는 얘기가 나오고 제가 너무 미안한 상황이 됐습니다. 그런데 윤 교수도 흔쾌히 축하를 해 줬어요. 연수원 동기가 5명인데 그동안 뿔뿔히 흩어져 지내 제대로 만날 시간이 없었는데 작년부터는 정기적으로 만나서 식사도 해요. 윤 교수도 이후에 웃으면서 만났고요(웃음)."

    이 재판관은 내정된 후, 임명장을 받기 전에 청문회를 먼저 거쳐야 했다. 청문회에서 이 재판관은 도덕성과 관련한 결정적 흠결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일부 현안에서 원칙적인 답변을 해 의원들로부터 '소신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질문이 대체로 헌재에서 내린 중요 결정과 앞으로 결정될 사건들, 또 중수부 폐지나 대법관 증원 등 정치적으로 이슈가 되는 내용이었어요. 양당 간 입장에도 차이가 있는 질문이었고요. 마음 속으로는 물론 생각이 정해져 있었지만 청문회에서 '제가 이쪽입니다'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재판도 한 건 결정하는데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3~4년이 걸려요. 정말 심도있게 논의하고 결론을 내리는데 청문회를 준비하는 2주 동안 짧게 생각하고 내 소신은 '이것이다'라고 답변하는 것은 법률가로서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소신없다는 비판을 받는 게 낫다는 게 제 소신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다. 결론을 내리는 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소신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모순이기도 하다. 이 재판관은 '너무 신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정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은 태도였다고 믿는다.

    40대에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되자 가족들의 반응도 걱정이었다.

    "저나 남편은 여러가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굉장한 부담이였어요. 아이들은 헌법재판관에 대해 잘 몰라 '법원에서 또 다른 일을 하는가보다' 하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딸이 중학교 3학년인데 사회책에 헌법재판에 관한 내용도 있더라고요. 지금은 제가 자신있게 설명해줍니다(웃음)."



    헌법재판관 중 연수원 기수가 가장 낮은 이 재판관은 이동흡(60·사법연수원 5기) 헌법재판관의 '일주일 배석'이기도 했다. 2000년도 이동흡 재판관이 서울고법 부장판사일 때 고등부장 인사발령이 나고 일주일 동안 배석판사로 근무한 인연이다. '모셨던 부장' 선배들과 평의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법도 했다.

    "재판관은 9인이 모두 동등한 권한과 발언 자격이 있기 때문에 기수가 낮거나 온 지 얼마 안됐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평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준비하는 게 더 힘든 부분이 있어요."

    이 재판관은 작년에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있으면서 한달 정도 통기타를 배웠다. 하지만 재판관으로 지명되는 바람에 그만뒀다.

    "일하면서 여유가 없어서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지는 못했어요. 테니스, 탁구, 수영 등 운동을 배우다 그만둔 것도 많지만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아요. 요즘에는 시간 날 때마다 책을 많이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40대에 재판관이 됐고 6년이 지나면 이 재판관은 50대 중반이 된다. 공직은 퇴임하지만 사회생활을 그만두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다. 이 재판관은 국민들이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들이 퇴임 후 변호사 활동을 안 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회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전관예우는 오랫동안 논란이 돼 온 부분인데 법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전관변호사가 선임됐다고 해서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이 전관예우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의혹이 없어지도록 법조인들이 모두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재판관은 퇴임 후 생활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퇴임과 동시에 사회 활동을 접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변호사가 돈을 많이 번다는 측면이 아니라 공익적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이들 공부가 안 끝나서 변호사 활동을 안하겠다고 못박을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는 공익적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그 쪽으로 활동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글=정수정 기자·사진=좌영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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