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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포럼

    국민청원 재판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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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압박에 굴복한 것인가. "성인지 감수성 제로에 가까운 판결과 피해자를 2차 가해한 판사를 이 법정에서 볼 수 없게 이 사건에서 제외, 자격 박탈시켜주십시오"라는 국민청원대로 되었다. 순식간에 40만을 넘긴 청원동의의 위력에 물러서고 말았다. 사법부는 스스로 무너지는 법관의 독립을 맥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해명이라고 내놓았지만 구차하다. 아무리 국민의 분노가 법원을 향해 돌진했더라도 백기 투항했어야 했는지 매우 실망스럽다. 여론의 압력은 독재시대 정치권의 압력, 사법농단 사태처럼 법원 내부로부터의 압력과는 다른 형태의 사법독립 침해요소다. 그에 대한 대처가 아주 미숙하고도 미흡했다. 당사자인 재판장의 재배당 요청을 말리면서 보호막을 쳐주었어야 했다. 아무리 사법농단 사태로 국민의 신뢰가 바닥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사법독립을 지켜냈어야 한다. 여론에 등 떠밀리는 사법부를 누가 신뢰하겠는가. 

     

    "왜곡·과장된 보도로 인한 과도한 비난마저 온전히 법관 개인이 책임지고 감당하라는 것은 온당치 않다"라고 하소연할 것이 아니라 언론 보도가 왜 왜곡이고 과장인지, 스스로 물러난 재판장의 판결에 대한 비난이 왜 과도한 것인지 반박했어야 한다. 그가 맡은 성범죄사건 판결에서 왜 벌금형이고 집행유예일 수밖에 없었는지 자세히 해명했어야 한다. 그리고 공정한 재판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법과 제도로 인정된 제척·기피제도를 통해서, 판결 자체가 문제라면 상소제도를 통해서 바로잡는 것이 심급제도의 존재 이유고 법치국가의 원칙이라고 설득했어야 한다. 법관의 자의를 배제하기 위한 양형기준도 시행되고 있으니 재판을 지켜보자고 호소했어야 한다. 국민청원의 내용은 판결을 소상히 소개한 것도 아니고 판결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핵심키워드로 정리해 놓은 것이어서 동의를 받기에 부족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항변했어야 한다.

     

    반문명적이고 반인륜적 성착취 범죄자라 하더라도 사법제도 내에서 절차에 따라 유죄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법 정의가 세워진다. 언론 보도 때문에 형성된 여론과 실체 없는 국민 법감정에 재판이 영향을 받는다면 비민주적이고 반문명적인 광장재판이 될 수 있다. 재배당받은 재판장에게 과연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판결 후에 등장할 국민청원이 재판 내내 어른거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이런 행동과 상황이 사법농단에서 드러났던, 법관의 독립을 심각하게 침해한 윗선의 재판간섭행위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선례가 만들어졌으니 앞으로가 걱정이다. 기우였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서 소송당사자와 그 변호인들은 온갖 전략을 동원한다. 자신들에게 불편한 법정을 피하고 유리한 판결을 내릴 법원을 고르는 포럼쇼핑(forum shopping)이나 우호적인 판사를 선택하려는 판사 고르기(judge shopping) 전략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선례는 새로운 소송전략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기업 친화적 판결을 내린 적이 많은 법관을 피하려고 노동계가 국민청원으로 100만의 동의를 얻어낸다면 재판부를 바꿔줄 것인가. 페미니즘적 판결을 피하고자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연대하여 국민청원을 동원한다면 재배당할 것인가. 사법의 신뢰회복은 멀어져만 가고 법치주의의 보루에 금가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다.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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