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냐?" 이것은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뜻의 지난 세기 개그다. 잊혀진 개그처럼 보자기도 요즘엔 잘 보이지 않는 과거의 물건이 되었다. 그런 보자기가 상시적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우리 공판검사실이다. 매일 아침 공판검사들은 공판부 입구에 마련된 보자기함에서 보자기를 꺼내 그날의 공판 기록을 보자기에 싼다. 재판을 마친 기록들은 다시 보자기에 싸여 돌아오고, 그렇게 보자기는 쉼 없이 순환되는 공판실의 필수품이다.
보자기의 색깔은 빨강, 파랑, 골드, 핑크까지 다양한데, 언젠가 공판검사들끼리 모여 이야기 해 본 결과 각자 선호하는 보자기가 달랐다. 다양한 취향 중에도 유독 선고가 있는 날은 빨강색을 고집하는 검사가 있어 그 이유를 물으니 답은 간명했다. "승리의 레드!" 각자 선호하는 보자기가 있다 보니, 공판 일정이 많은 날에는 나름 보자기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찍 출근하는 자가 마음에 드는 보자기를 얻을 수 있으니, 우리는 그런 자를 '보자기 얼리버드'라고 불렀다.
보자기의 가장 큰 단점은 폼이 안 난다는 것인데, 날렵한 테블릿 하나만 가지고 들어와 손가락 하나로 기록을 넘기는 젊은 변호사들에 비해, 주섬주섬 보자기를 푸는 검사의 모습은 어딘가 프로패셔널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자기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유용성 때문이다. 보자기는 얇은 기록부터 웬만큼 두꺼운 기록까지 너끈히 쌀 수 있다. 가방이나 박스처럼 원래의 부피와 모양을 고집하지 않고, 기록의 모양과 두께에 따라 얼마든지 스스로를 맞추는 유연함을 가졌다. 게다가 보자기는 그 스스로 차지하는 무게와 부피가 거의 없다. 최선을 다해 기록을 부여잡고 옮긴 쓸모를 다한 후에도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접혀 다음의 쓸모를 기다릴 뿐이다.
세상과 사람의 사연들을 기록으로 묶어 법정으로 옮기고, 이를 다시 법정에서 풀어내는 것이 공판검사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우리는 보자기와 같다.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냐" 하기 전에, 저 유연함과 겸손함을 배워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장 인기가 없어 마지막까지 보자기함에 남은 핑크색 보자기를 집어 들며 문득 생각해 본다.
정명원 검사 (서울북부지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