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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포럼

    블라인드와 공정 사이

    천경훈 교수 (서울대)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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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결정이 좋을까, 제한된 정보에 기반한 결정이 좋을까? 편견을 배제한 결정이 좋을까, 편견을 지닌 결정이 좋을까? 답은 어렵지 않다. 충분한 정보에 터잡은 결정은 좋고, 충분한 정보 없이 하는 결정은 나쁘다. 편견 없는 결정은 공정하고, 편견 있는 결정은 불공정하다.


    그런데 실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다양한 정보 중에는 편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보도 섞여 있다. 그렇다고 편견의 여지가 있는 정보를 죄다 배제하다 보면, 별로 아는 것 없이 결정하게 될 위험도 있다. 공정한 결정에 대한 집착이 충분한 정보에 기한 결정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동안 어떤 의사결정에서 편견을 우려하여 특정 정보의 활용 자체를 아예 금지하는 예는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 채용과 입시에서 그런 예가 늘어나고 있다. 30인 이상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는 신체조건, 출신지역, 재산, 가족의 재산·직업·학력 등을 알아서는 안 된다. 공공부문에선 본인의 학력도 블라인드 대상이다. 법학전문대학원 입시에서도 출신학교나 부모의 직업을 명시·암시하는 기재는 금지된다. 공정한 선발이란 취지에는 공감이 가지만, 편견을 막고 공정을 실현하기 위해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내 앞에 서 있는 청년이 어떤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했는지 모르면서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껏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모른 채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물론 규정을 준수하면서도 비슷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긴 하다. 자기소개서를 예로 들면, '화재 현장에서 다친 소방관 아버지' 대신 '공무상 산재 사례'를 보며 사회보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쓰면 된다. 하지만 이런 검열 속에서 자기소개서는 생생함을 잃고 천편일률적이 된다.

    결국 남는 것은 정량지표. 법전원 입시에서는 학점, 리트점수, 영어점수이다. 이런 정량지표는 과연 편견 없는 지표일까? 좋은 학점은 알바 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경제력 또는 '꿀강'을 고르는 정보력 덕분일 수 있다. 좋은 리트점수는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젊은 뇌에 힘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좋은 영어점수는 어려서부터 영어에 노출된 유복한 환경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처럼 객관적인 것 같은 지표도 사실은 주관적인 사정을 내포하고 있다. 정량지표에만 의존하면 실제로는 구조화된 불공정을 그대로 수용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시인 정현종은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온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요즘 입시나 채용에서 지원자는 이런저런 정보를 가리고 피카소 그림 속 인물처럼 모호한 모습으로 온다. 블라인드가 공정이라고 믿는 지금 추세라면 앞으로는 전공, 군경력, 이전 직장 등 가려야 하는 정보가 더 늘어날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지원자는 이제 몬드리안 그림처럼 사각형과 원으로 구성된 추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감사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각형의 넓이와 원의 지름을 측정하여 그 어마어마한 일을 단순하게 처리할 것이다. 공정의 이름으로.


    천경훈 교수 (서울대)

    마세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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