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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제발 말 끊지 말고

    차기현 판사 (광주고법)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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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현자여, 말은 머리와 꼬리가 있으니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때 끼어들지 말라. 현명하고 사려 깊으며 지성을 갖춘 자여, 타인의 말이 끝날 때까지는 말하지 말라."


    오래 전 이슬람 경구를 모아놓은 '장미의 낙원'이라는 책에서 보고 수첩에 옮겨 놓은 문장이다. 요즘 일주일에 반나절 정도는 수명법관으로 변론준비기일을 진행하는데, 법정으로 향하면서 '말 끊지 말자'라고 늘 다짐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러다간 현명함, 사려 깊음, 지성과는 영영 거리가 먼 사람이 될 것 같아 두렵다.

    어느 날은 사건마다 한 시간씩 총 세 건의 준비기일을 쉼 없이 진행하고 돌아왔다. 몸은 파김치가 됐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좋고, 내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700마력짜리 스포츠카를 타고 시원하게 '풀악셀' 밟은 뒤, 이제 막 주차를 하고 난 것처럼 마음 속 RPM이 잘 떨어지지 않고 묘하게 뭔가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럴까 싶어 준비기일에서의 상황을 되새겨보았다. 생각 끝에 그 이유가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법정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원 없이 하고 왔다는 것을…. 수첩에 적어 놓은 경구가 무색하게, 각자의 사정을 열심히 설명하려는 당사자와 대리인들의 말을 중간 중간 끊어 먹었다는 것을….

    재판에 오는 분들이야 아무래도 말하는 이가 판사다보니, 중간에 말을 끊고 들어와도 대놓고 싫은 내색은 잘 못할 것이다. 쓸데없이 길게 말해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흡인력 넘치는 분위기에 스스로 빠져들어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늘 스스로 경계하게 된다. 오늘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막 좋고 자신이 엄청 매력적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면, 그건 혹시 내가 원 없이 말을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만약 그 상대방이 내 말을 꾹 참고 들어줄 수밖에 없는 지위에 있다면 거의 100%다.

    말하는 즐거움을 나에게 빼앗기고 듣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그 모든 이들이 나에게 혹시라도 다음 기회를 준다면, 그땐 정말 듣고, 듣고 또 듣겠다고 다짐해본다. 제발 말 끊지 말고.


    차기현 판사 (광주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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