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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8-2)

    2부 가필(加筆) ⑧ 시절을 잘못 만난 부장검사

    박솔잎 기자 soliping@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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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수행과 인간관계의 기본은 소통이다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장 - Ⅱ

    (1982. 08. 16. ~ 1985. 03. 11.)



    특수부장 시절 본연의 업무와는 상관이 없으나 보람된 일도 있었다. 경찰과 의사에 대한 특강이다. 수강생인 경찰 수사 간부들은 향후 범죄와의 전쟁 수행 중 큰 역할을 했다.


    특강 당시를 되돌아보면, 당시 경찰 총수는 내무부 치안본부장 K 씨로서 나의 대구지점 초임 검사 시절 관하 일선 경찰서의 수사과장직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대구지검에서 차장검사 지시 사항 이외에 사법경찰관 교양 자료의 책자도 만드는 전담검사였으므로 관할경찰서에 대한 유치장 감찰 등의 기회에 사법경찰관 교양 자료를 근거로 사법경찰관을 지도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 바 있었다.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 치안본부장이 내게 위 간부들의 수사 교육과정에 특강 시간을 마련해 놓았으니 와서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게 됐다.


    서울지검 검사 시절 경찰 수사권 독립 움직임 때문에 큰 고생을 한 바 있었으므로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한두 시간의 강의로는 부족하니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의 특강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하여야 한다고 주문하고, 강의의 제목을 특정해서는 안 되며, 말 그대로 특강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치안본부장의 특별 지시에 따라 수사 간부 특별교육과정에 6번의 특강 시간이 내게 배정되었다.


    내가 이런 제의를 하고 그 교육과정에 참가하여 특강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또 재연될지 모르는 경찰의 수사권 독립 움직임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뜻 이외에, 일선 경찰의 수사 현실과 애로 사항을 소상히 파악하여 검찰에 전파함으로써 검경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면서 검사로서 적절히 사법경찰 관리를 지휘하여 형사소송법 본연의 취지를 살리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나는 법무연수원 파견 근무 시절, 강사의 결강이 있을 때마다 교육과정에 참가한 검사들에게 특강은 아니었으나 정담 비슷한 형태로 그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대화한 많은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런 교육과정에 특강을 하는 강사로서의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내 직책이 서울지방검찰청의 특별수사부장이었고, 또 몇 년의 특별수사 경험도 축적하였던 때였으므로 경찰 간부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면서 대화하고 싶었다. 수강생이었던 경찰 간부들은 전국에서 수사 실무를 담당하거나, 앞으로 수사 간부가 될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는 결국 보람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 직책 이름 때문이었던지, 수강생 모두가 진지한 태도로 나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나의 일상적인 말로만 끝나는 강의가 아니라 검사와 사법경찰관 사이의 진지한 의견 교환과 토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법의 특강이 이어졌다.이 강의가 6번에 걸쳐 이어져 갔다. 많은 대화가 오간 것임은 그 시간이 말해주는 것이다. 말문이 열리기 시작한 경찰관들의 말에는 실로 경청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내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경찰이 검사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또 그들이 검사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상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 또한 검사들이 경찰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 내가 이 교육과정에 강사로 참여하여 느낀 소감과 함께 검찰이 경찰의 처지를 알고 지도하여야 할 많은 내용이 상부에 보고되어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 또는 대검 차장검사의 지시로 일선 검찰에 하달되었음은 물론이다.


    먼 훗날 내가 대검찰청의 강력부장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던 여러 경찰 간부들이 본부와 일선 경찰의 요직에 기용되었으므로 나는 경찰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또, 00대학교 부속병원의 초임 의사 수십명 앞에 강사로 나선 검사의 결론은 “양방에만 의지하면 절대로 명의가 될 수 없다. 약과 주사만이 능사가 아니다. 문진, 시진, 촉진, 검진의 과정을 거쳐 환자의 심리상태를 잘 살펴서 환자 스스로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자생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사람의 몸은 그 자체가 곧 소우주이다. 한의학의 오묘한 이치를 잘 살펴서 사람의 몸을 자연의 이치에 맞게 다스려야만 명의가 될 수 있다. 허준 선생의 일생을 참고하여 의사로서 대성하기 바란다”였다.

    경찰 간부 수사 교육과정 특강 배정 받아
    6회에 걸쳐 간부들과 진지하게 의견 나눠

    경찰이 검사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상히 알게 돼

    훗날 ‘범죄와 전쟁’ 지휘 때 큰 도움


    특수1부장실은 기자들의 왕래가 잦은 곳
    부속실 직원이 신원 확인 후 출입 허용


    하루는 검사장이 차 한잔하러 들렀다가
    “누군데 사전연락 없이…” 직원 말에 돌아서
    얼마 후 “부장이 그렇게 높은 줄 몰랐다”

     


    이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를 적어 둔다. 특별수사 제1부장 시절의 이야기다.


    서울 덕수궁 옆에 있던 당시의 검찰 종합청사는 15층 건물로서 정방형에 가까운 백색 타일 건물이었다. 그 청사가 신축된 후 이 건물은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및 서울지방검찰청의 모든 직원이 함께 근무하고 있는 검찰 종합청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건물에는 검찰총장을 위시하여 검사장급 이상의 검찰 고위 간부가 10명 넘게 근무하고 있었다.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 옆에 ‘국가기강(國家紀綱)의 확립(確立)’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돌에 새겨져 걸려 있어서 사무실에 올라올 때마다 이 휘호석을 볼 수 있었다. 서울지검 특별수사부는 이 건물의 4층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특수 제3부장실은 서향으로, 특수 제1부장실은 북향으로 된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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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12월 4일 당시 이종남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주최로 역대 서울지검장 초청 간담회가 열렸다. 사진 앞 줄 왼쪽부터 오탁근, 김병화, 김치열, 장재갑, 김형근, 최대교, 이태희, 이봉성, 당시 고인이 된 제3대 서정국 서울지검장의 부인, 김성재. 뒷줄 왼쪽부터 이종남 당시 서울지검장, 이명희 당시 대검 차장검사, 허형구, 서정각, 김일두, 강우영, 김석휘, 정해창, 서동권 당시 서울 고검장. 뒷줄 우측 다섯 번째가 송종의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 
    <제공=천고법치문화재단>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은 이종남(李種南) 씨였다. 이분은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특히 나를 각별히 총애하였으므로 내게는 검찰의 은인 같은 분이었다. 이분께서는 사석에서 나를 ‘여사머사 부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내가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서 이야기하면서 ‘사정이 여사머사하다’라는 말을 자주 썼던지, 하여튼 나를 그렇게 부르는 때가 많았다.


    검사장께서 점심 식사를 끝내고 6층의 검사장실에 가시기 전에 특수1부장실에서 차나 한잔하시려는 뜻으로 내 방을 찾아오셨던 모양이다. 검사장님께서 나의 부속실 직원에게 부장 계시냐고 물었다. 당시 나의 부속실에는 검찰직 주사보 한 명과 기능직 여직원 한 명이 근무하고 있던 때였다.


    이 두 사람이 내 방을 찾아온 사람이 검사장인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누구신데 우리 부장님을 뵙겠다고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뜻밖의 질문을 받은 검사장께서 놀라기도 했겠으나 다소 건방지다고 생각하였던지 다시 부장검사님 계시냐고 물었다.


    부속실 두 직원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사전 연락도 없이 찾아와 부장검사님을 뵙겠다고 하십니까?” 다시 물었으니 사정이 난처해진 것이다. 다소 불쾌한 기분으로 돌아서는 검사장의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특수1부장실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찾아와 면회하겠다고 하는 한심한 사람 다 보겠다”라는 내용이었다.


    특수1부장실은 수많은 법조 출입 기자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방이었으므로 부속실 직원이 반드시 신원을 확인한 다음 나의 허락을 받아야 출입이 허용되는 게 당시의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얼마 후 검사장님께서 찾으시기에 그 방에 들어갔더니 하시는 말씀이 걸작이었다.


    “야! 여사머사 부장이 그렇게 높은 사람인 줄 내가 미처 몰랐다. 오늘 특수1부장실 앞에서 내가 큰 망신당하고 왔다.” 이런 말씀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위와 같은 일이 있었음을 알았다. 서울지방검찰청의 직원이 소속 검사장의 얼굴도 모르는 가운데 근무하는 검찰 종합청사의 웃지 못할 실정의 한 단면이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먼 훗날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 되었을 때, 취임식이 거행된 직후 본청의 전 직원과 산하 지청의 사무관급 이상 직원 모두의 신상 신고를 받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


    나의 특수부장 재직 중 특별수사 제3부와 특별수사 제1부에서 함께 근무하였던 여러 검사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하면서 그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채방은(蔡方垠), 김각영(金珏泳), 김대웅(金大雄), 유제인(柳濟仁), 이범관(李範觀), 정홍원(鄭烘原), 김영진(金永珍), 윤종남(尹鍾南), 김성호(金成浩), 김상희(金相喜), 장창호(張昌浩), 강지원(姜智遠), 조창구(趙昌九) 등 13명이 그들이다. 이 검사들은 모두 검사장께서 나의 건의에 따라 특수부에 배치한 검사들이었다.


    내가 전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전보된 직후 위 13명의 연명으로 제작된 나의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3부장 및 제1부장 재직기념패가 내게 전달되었다.


    나의 특수 제3부장 때의 특수 제1부장은 김도언(金道彦), 특수 제1부장 때의 특수 제3부장은 정성진(鄭城鎭) 두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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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모셨던 검사장은 이창우(李彰雨), 이종남(李種南) 두 분이었으나 이창우 검사장은 7개월 정도 상사로 모셨고, 나머지 기간은 모두 이종남 검사장을 모시고 지낸 기간이었다.

     


    <정리=박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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