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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교절유

    황정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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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설 연휴 때다. 팔순을 넘은 아버님이 쉰 중반이 된 아들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으라고 한다. 한 자 한 자 받아쓰니 '식교절유(息交絶遊)'다. 교제를 그치고 유희를 끊는다는 말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첫머리에 나온다. 아버님이 필자에게 내린 경고성 사자성어다. 금연에는 성공했으니, 올해부터는 제발 절주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과음은 결국 교유에서 비롯되니, 교유를 끊어야 절주가 된다는 것이다. 아직도 부모님 걱정을 끼쳐드리는 필자는 요즘도 늘 반성 중이다.

    인간관계와 인맥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직장 회식, 친구들 모임, 동창회, 향우회, 친목모임, 골프모임, 등산모임, 경조사, 포럼 등 각종 모임에 참가하느라 들이는 시간이 사실 너무 길다. 여기저기 참석해야 하고, 이사람 저사람 만나야 하며, 이일 저일에 관여해야 한다. 사람노릇과 체면치레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 속에 살고 있다. 보통일반인도 그렇거니와 특히 정치인과 같은 사회지도층은 더 심하다. 실력보다는 연줄과 관계가 승진과 출세를 좌우한다고 믿는 경향도 강하다.

    선진외국은 다른 모양이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가 주영대사로 근무할 때 여왕 의전장이 아시아 국가 대사를 위해 골프모임을 주선했는데 영국 외교부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워 겨우 한 사람이 나왔다고 한다(칼럼집 '제자리로 돌아가라'). 영국 사람들은 외교관마저도 골프를 칠 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한다는 얘기다. 외국의 대학이나 국제기구에서 15년이나 근무했던 조 박사는 우리나라 정치인, 관료, 언론인, 인문사회과학분야 교수들이 독서, 연구, 토론에 보내는 절대시간이 외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우려하고 있는데, 필자도 동의한다.

    우리나라는 열정(땀)으로 산업화에 성공했고, 투쟁(피)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피와 땀만으로는 부족하고, 지도층이 선진국과 겨룰 수 있는 지성·지식·합리성(눈물)을 갖추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흔히 국력은 경제력, 군사력, 소프트 파워, 사이버 파워를 합친 것이라고 하는데, 사회지도층이 갖춘 지식의 힘이야말로 국력을 좌우한다. 우리나라 특유의 음주문화와 모임문화 때문에 사회지도층, 특히 정치인, 언론인, 고위공직자가 읽고 사색하고 토론하는 데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에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년 설날에도 또 식교절유의 질책을 듣게 되지 않을까 오늘도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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