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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의 힘

    사실의 힘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 성추문과 관련하여 탄핵 위기까지 갔을 때였다. 특검팀이 의혹을 규명하기 위하여 르윈스키의 속옷에 묻어있던 정액 몇 방울이 대통령의 것인지 확인하겠다고 하자 나라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국익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미국 내 여론이 만만찮았다. 그러나 결국 클린턴은 일정 도중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른 방에서 혈액샘플 채취에 응해야 했고,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자 백악관 연설을 통해 ‘깊은 후회’를 표명했다. 이후 미국은 밝혀진 사실에 기초하여 사태를 수습했고, 상원이 탄핵안을 부결시킴으로써 클린턴은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의 권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소설가 김훈은 이 정액 몇 방울의 ‘사실’이 미국을 오히려 치욕의 수렁에서 건져주었다고 평가했다. 또

    김봉원 고법판사 (서울고법)
    직업으로서의 법률가

    직업으로서의 법률가

    독일어로 베루프(Beruf)라는 단어는 ‘직업’을 뜻하기도 하고 ‘소명’을 뜻하기도 한다. 1919년, 막스 베버는 뮌헨 대학에서 학생단체의 요청으로 강연을 한다. 그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이 '직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이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정치적으로 큰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학생들은 독일의 정치상황에 뛰어들겠다는 열망이 있었고 베버가 그 열망을 충족시켜 줄 답변을 해주리라 기대했다. 베버는 ‘학생들의 요청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지만, 이 강의가 틀림없이 학생들을 실망시킬 것이다’라며 강연을 시작한다. 스스로 학자이면서도 정치가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했다는 그는, 열정만으로 정치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세 가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KCL)
    특허와 영업비밀 사이

    특허와 영업비밀 사이

    “특허와 영업비밀” 두 단어는 닮지 않았지만 닮았다. 발명가들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나의 발명을 영업비밀로 숨길 것인가, 아니면 특허를 받아 대놓고 보호받을 것인가. “특허발명”은 특허를 받은 발명이다. 특허를 받으려면 새로워야 한다. 선행기술로부터 쉽게 생각할 수 없어야 한다. 산업상 이용 가능해야 한다. 반면, "영업비밀"은 숨겨져 있어야 한다.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합리적’인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되어야 한다. 나의 발명을 “영업비밀”로 간직하면 천년, 만년 영원하다. 하지만 똑같은 발명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영업비밀”을 직접적으로 빼오면 처벌받는다. 독자 개발해야 한다. 코카콜라의 제조법인 Merchandise 7X는 100년간 비밀이 유지되고 있다.

    김욱준 부장검사 (대전지검)
    Cut Corners(절차생략, 원칙무시)

    Cut Corners(절차생략, 원칙무시)

    영어표현에 cut corners 라는 말이 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코너를 제대로 돌지 않고 가로질러 도는 것에서 나온 말로 대체로 편의를 위해 원칙 또는 절차를 무시하는 것, 혹은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고 꼭 거쳐야 할 과정을 건너뛰는 경우를 말한다. 지난 한 해 인명피해를 유발한 사고들 중 우리가 cut corners하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들이 참 많았다. 비상구가 목욕 용품을 넣어 놓는 창고로 불법 전용되어 화재 시 본래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현장, 지반 강도에 대한 확인 절차를 생략하고 대형 크레인을 설치하기 힘든 연약한 지반에서 공사를 강행하다 인명피해를 유발한 강서구 철거 현장. Cut corners의 예를 찾기 위해 멀리 볼 것도 없다.

    김용상 외국법자문사 (오멜버니 서울사무소 대표)
    ‘신과 함께’ 그리고 변론

    ‘신과 함께’ 그리고 변론

    인기 웹툰을 각색한 영화 ‘신과 함께’가 화제다. 망자가 사후 세계에서 저승시왕에게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인상 깊은 것은 전지전능한 신이 주재하는 저승의 재판에서도 일종의 소송당사자인 망자를 위하여 변호인이 적극적인 변론을 펼친다는 사실이다. 특히 원작인 웹툰에서 변호인 ‘진기한’의 활약상은 눈부시다(영화에서는 저승차사가 변호를 맡았다). 변호인은 재판을 위한 대응전략을 짜고 필요한 사실과 증거를 수집한 후 망자의 유리한 정황을 내세워 정당한 심판을 구한다. 저승시왕은 핵심을 찌르는 변호인의 날카로운 변론에 설득된다. 일선에서 법관들은 좋은 변론이 좋은 재판을 만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전문화되면서 법원에서 심리하는 사건들은 사실관계가 복잡하

    김봉원 고법판사 (서울고법)
    새로운 기쁨

    새로운 기쁨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을 나와 여의도 금융가를 걷다보면 한 쪽에 10층짜리 건물이 숨어 있는 듯 자리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내려 나무계단을 사뿐사뿐 걸어 올라가니 아늑하고 평화로운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방 안에 소박한 꽃나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상이 있고 왼쪽으로 훤히 트인 창문으로 여의도가 내려다보인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그 이름 그대로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2016년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때 이태영 박사의 혼이 담겨 있는 그곳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씩 법률상담을 시작했다. 이태영 박사는 1950년대 가난하고 암담한 한국 여성의 현실을 목도하고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러나 "지극히 소박한 소망으로 가정 법률상담사업을 시작했을 때 결코 그 누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KCL)
    지휘와 외압 사이

    지휘와 외압 사이

    새해다. 대부분 새해 결심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작년 결심은 잊어먹었다. 혹여 기억하는 사람은 실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 부장검사로서의 나의 결심은 “지휘와 감독을 구별하자”는 것이다. 지휘(指揮)는 ‘어떤 일의 해야 할 방도를 지시하여 시킴’을, 감독(監督)은 ‘일이나 사람 따위가 잘못되지 않도록 살피어 단속함’을 뜻한다. 지휘는 한자에 ‘손가락(扌)’이 있어 ‘방향성 제시’, 감독은 한자에 ‘눈(目)’이 있어 ‘잘못을 고침’쪽에 방점이 있다.    형사부장검사들은 월 1500여건의 결재를 통하여 부원들을 지휘·감독한다. 연말에는 ‘화장실은 밥 먹으러 갈 때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재에 매진한다. 결재행위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나누어 보

    김욱준 부장검사 (대전지검)
    가위눌림

    가위눌림

    종이에 만년필이 빠르게 긁히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무슨 시험장인 것 같다. 시간은 오후 3시 25분. 주위 사람들은 빠르게 답안을 적어가고 있다. 사시 2차, 민법 시험을 보는 중이다. 35분 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나는 1번 문제도 풀지 못하고 있다. 식은 땀이 나고 현기증이 돈다. 어디선가 기도하고 있을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이게 아닌데, 이럴 수 없는데… 몸을 일으키려고 해보지만 일어날 수 없다. 꿈이었다. 거의 20년 전의 일인데도 가끔 이런 꿈을 꾼다. 요즘은 지방재판을 가는데 KTX를 놓친다거나 증인신문을 하려고 할 때 아무리 찾아도 신문사항이 없는 꿈들을 좀 더 빈번히 꾸지만 말이다. 일전에 대법관 한 분과 식사를 할 때 그 분도 아주 가끔 사법시험 보는

    정원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검사 선서문

    검사 선서문

    ‘다사다난’했던 2017년이 저물고 있다. 돌이켜보면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관통한 화두는 개혁이었다고 생각한다. ‘개혁’ 내지 ‘혁신’은 잘못된 제도, 관습, 사고를 바로 잡아 새롭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뜻한다.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 기업 중에 개혁이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한 공동체나 조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은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가치이고 본연의 기능을 더 잘하도록 만드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검찰도 개혁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검찰개혁 논의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어서 심지어 필자가 검사로 임관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검찰은 늘 개혁의 대상이 되어온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평일 야근은

    김영기 부장검사 (서울서부지검)
    사법신뢰로 가는 길

    사법신뢰로 가는 길

    판사를 포함한 법조인의 고질적인 직업병이 ‘의심병’이라고 하면 공감하실 분이 상당하리라. 판사는 당사자나 증인의 말에 의심부터 하고 진위 판별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명확한 물증이 있는 사건보다는 관련자의 진술에 의존하는 사건이 많다보니 그 진위 판단이 곧 재판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 그렇다보니 일상생활에서도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일단 의심부터 하여 가족들에게조차 핀잔을 듣기 일쑤다. 반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불리한 판결을 받은 측은 혹시 판사가 부적절한 이유로 그런 판단을 했다는 의심부터 하곤 한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에서도 그런 경우를 종종 본다. 같은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시선을 감추지 않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이니 일반인들은 오죽하랴

    김종복 부장판사 (목포지원)
    공평과 정의

    공평과 정의

    세상은 참 불공평해. 흔히 듣는 말이다. 소위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유력자의 딸 모씨가 친구들에게 “돈도 실력이야”라 말한 것이 국민적 공분을 자아낸 일만 보아도 한국인들은 불공평하다 느끼면 가만히 못 있는 것 같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게 한국인이라는데 이런 한국인들이 자본주의를, 황금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공산주의를 하는 것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의 80%가 동의한다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 역시 한국인들의 이런 평등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절대군주 루이16세를 하루아침에 단두대에 이슬로 보내버린 프랑스 대혁명도 베르사이유 궁전의 휘황찬란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 부르주아와 도시노동자들의 마음속에서부터 싹텄다. 당시 마리 앙

    김진욱 선임연구관 (헌법재판소)
    국감의 추억

    국감의 추억

    “동그라미 말고 검정 네모로 해야지, 아니 다이아몬드가 좋은가? 그건 아래 당구장 표시하고 적고. 참모총장은 줄이 바뀌면서 끊어지면 안돼. 자간 줄여서 한 줄로 정리해….” 평소보다 검토가 빡빡하다. 총장님이 국정감사에서 답변할 자료라서 그런가보다. 2001년 가을이었다. 공군법무관으로 일할 때 국정감사 대응 업무를 맡았다. 국회에서 보낸 질의 중 법무와 관련된 답변 초안을 작성하고 국감장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돌발 질의가 나오면 즉석에서 답변자료를 만드는 게 주된 일이었다. 국방위 국감 당일, 국감장 옆 복도에서 노트북을 들고 대기했다. 수많은 별들이 지나가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기하라며 잔뜩 기합을 불어넣었다. 국감이 시작되었다. 얼마되지 않아 육군과 관련된 이슈가

    정원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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