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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의 카이로스(kairos)

    12월의 카이로스(kairos)

    '다시 살아도 또 이 삶을 살고 싶도록 나는 살고 있는가' - 니체 - 헬라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말로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크로노스는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자연적인 시간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반면에 카이로스는 나에게만 허락된 시간으로 나의 선택에 의해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회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카이로스의 외모를 보면, 앞머리는 길고 무성한 곱슬머리인데 반해 뒷머리는 민머리이고, 왼손에는 저울을,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으며, 발뒤꿈치와 등에는 날개가 달려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민머리인 이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배드 파더스(Bad Fathers)

    배드 파더스(Bad Fathers)

    인터넷 사이트 '배드 파더스(Bad Fathers)'에 양육비를 주지 않는 전 배우자 150명의 신원을 공개한 일이 있다는 뉴스를 최근 접하였다. 이 사이트에는 이름과 얼굴 사진은 물론이고 출신 학교나 직장, 주지 않는 양육비 금액까지 명시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이트에 신원이 공개된 사람은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한 이유는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년간 소송으로 양육비 이행의무가 확정된 배우자 중 70%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뉴스를 접하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가 생각났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부인과 이혼한 후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키우면서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골수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여백(餘白)과 공백(空白)

    여백(餘白)과 공백(空白)

    어떤 삶인들, 누구의 인생인들 바쁘지 않고 힘들지 않겠는가마는 내 삶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채로 타인의 삶에까지 관여해야 하는 법조인의 일상은 누구보다 분주하고 여유가 없다. 대부분의 법조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분, 일초를 아껴가며 쉴 틈 없이 일하기 마련이고, 잠시의 공백이라도 주어질라치면 불안한 마음에 혹시 오늘 할 일 중 무언가 놓친 것은 없는지 고민하느라 결국 그 공백마저 꽉꽉 채워 하루를 보내곤 한다. 판사들의 경우에도 10분 단위로 오전, 오후에 빽빽하게 재판기일을 지정한 다음, 수 십여 건의 사건들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한 후에야 비로소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법조인은 으레 사건을 완벽하게 파악하여 정확한 결론을 내린 다음, 상대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저를 사형에 처해 주십시요"

    "저를 사형에 처해 주십시요"

    최근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를 사형시켜 달라고 딸이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을 한 일로 인해 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오죽했으면 딸이 친아버지를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켜 달라고 청원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형사합의 사건을 재판할 때이다. 두 아이를 죽인 어머니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재판받기 위하여 법정에 나왔다. 이 여인은 법정에 나오자마자 인정신문도 하기 전에 손을 번쩍 들더니 판사님 저에게 말을 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허락하였더니 갑자기 방청석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저는 두 아이를 죽인 엄마입니다. 저를 사형에 처해 주십시요”라고 절규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정은 이렇다. 한때 직장생활을 잘하였던 여인이 결혼도 하고 아이 2명을 낳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도로무익(徒勞無益)

    도로무익(徒勞無益)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 - 법원의 11월은 언제나 분주하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 장기미제도 올해 안에는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하고, 상반기 내내 치열하게 다투던 까다로운 사건들도 하반기에는 결론지어야 하는 판사의 마음은 누구보다 분주할 수밖에 없다. 비단 사건처리뿐만 아니라 통상 1~2년 단위로 사무분담이 변경되고 인사이동을 하게 되는 판사에게 있어서, 11월은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하는 유독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좋은 판결

    좋은 판결

    솔로몬 왕 앞에 창기 두 여인이 섰다. 두 여인은 한집에 사는데, 사흘 간격으로 아이를 낳았다. 잠을 자다가 한 여인의 아이가 깔려 죽었다. 둘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것이다. 왕 앞에까지 와서 재판을 받는 것을 보면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유전자감식 등 친자를 구별하는 방법이 없으니 그 아이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별해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 같다. 솔로몬 왕은 칼을 가져와서 그 칼로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절반씩 주라고 명한다. 그러자 그 아이의 친어머니가 “그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시고 죽이지 말라”고 절규한다. 솔로몬 왕은 절규하는 여인이 친어머니이니 산 아이를 그 여인에게 주라고 판결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솔로몬이 한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진심을 전하는 방법

    진심을 전하는 방법

    "내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슨 말을 들었느냐가 중요하다." - 피터 드러커 - # 70세 남짓의 할머니가 피고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로 법정에 출석하였다. 공사대금 청구사건이었는데, 공사 범위부터 공사대금 지급내역, 하자 부분까지 쟁점도 많고, 제출할 입증자료도 많은 사건이었다. 이에 재판장은 첫 변론기일에 혼자 출석해 별다른 주장도 하지 못하는 피고 대표이사에게 이 사건 공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실무 담당자를 소송대리인으로 신청하여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설명하고 소송대리인 신청절차에 관한 자세한 안내까지 한 후 변론기일을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준비서면을 받게 되었다. 피고 대표이사로서 충분히 소송수행을 할 수 있는데도 재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주홍 판결

    주홍 판결

    #1 서울가정법원에서 일할 때이다. 당사자(피고)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 내용은 “판사님이 판결한 주문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판결 이유로 적시한 것 중 반은 진실이 아닙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은밀한 공간에서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사실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실의 인정은 대부분 부부로부터 들었다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증언 내용이 신청한 당사자들에게 유리하게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 판결문을 자녀들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부모들이 이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녀들에게 보여 준다면 그 자녀들은 부모들에 대하여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 부정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개와 고양이의 진실

    개와 고양이의 진실

    개 : 인간은 나를 먹여주고, 지켜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 : 인간은 나를 먹여주고, 지켜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고양이’ 중에서 - 민사재판을 하다보면 별다른 객관적 증거 없이 당사자 주장만 있는 애매한 사건을 종종 보게 된다. 소송가액도 크지 않고 어려운 법리도 없는 사건이지만 증거는 턱없이 부족한데 의례히 당사자들은 완벽하게 다른 주장을 하기 마련이라 재판부로서는 판단을 내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히 양측 모두 자신의 기억이나 경험이 절대적으로 진실하다는 확신 하에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배신의 감정이 커진 상황이라 가까운 관계라도 조정조차 쉽지 않다.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배려와 관용이 있는 사회

    배려와 관용이 있는 사회

    지적장애인(자폐아)의 아들을 둔 부장판사의 소원이 자기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사는 것이란다. 애련(哀憐)의 마음을 금치 못한다. 이번 추석 연휴에 ‘채비’라는 영화를 보았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엄마가 암에 걸려 죽기 전에 그 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처절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감동적으로 보았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둔 부모들의 심정이 어떠한지 절절히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장애인 자녀를 둘 수 있다. 내가 원해서 장애를 가진 자녀를 낳은 것이 아닌데, 그 부모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다. 사회는 어떠한가. 이들의 삶의 무게를 덜어 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에게 편견과 차별이라는 무게를 더 올려 주고 있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냄비속의 병아리콩

    냄비속의 병아리콩

    그다지 크지 않은 법원에서 매주 다른 변호사들을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 최근 변호사 숫자가 폭증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실제로 2018년 9월 12일 기준 등록 변호사는 전국 총 2만5279명에 달하고, 최근 7년 동안 1만명이 증가하였다고 한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단기간 내에 변호사 숫자가 폭증하다보니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초임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미숙한 변론을 하는 경우가 많아 재판장으로서 쉽지 않다는 정도의 지극히 이기적인 감상을 늘어놓곤 했었다. 그런데 사법연수원에서 교수로 근무한 후 재판부에 복귀하고 보니 법정에서 초임 변호사들의 부족함을 보게 되더라도 스스로의 부덕함을 반성하며 너그럽고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된 듯하다. 가끔은 다분히 꼰대스런 나의 걱정과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예수님께 끌고 와서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유대인의 종교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현장에서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외침에 전혀 답을 하지 않으신 채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 이는 그들의 격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하신 것 같다. 그런 후 예수님이 “너희 중에 먼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모두 그 자리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소액사건을 하다 보면 인터넷에서 악성 댓글을 쓴 사람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건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이 쓴 댓글을 보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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