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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法臺에서 리스트

    녹두

    녹두

    새해 연휴에 집어 든 책은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서해문집, 2017)입니다. 여러 해 책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게 안타까워 이번에야말로 읽어주겠다는 자비심의 발로였습니다. 150여 쪽에 불과해서 넉넉잡아 반나절이면 볼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도 깔려 있었지요. 그러나 연휴 내내 책을 끼고 있으면서도 다 보지 못했고, 책은 150쪽이 아니라 15,000쪽 이상의 무게로 나를 번민(煩悶)하게 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6번의 공초(供招, 신문기록)와 판결문이 번역되어 있는 이 책은 내게 묻습니다. 역사적 전환기에 재판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가.   녹두장군의 실패와 죽음은 그 자체로 비장한 서사시입니다. 불의에 항거했던 장군이 만민이 고르고 편하게 사는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신경치료

    신경치료

    치통으로 치과를 찾아 진료를 받고, 신경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다. 신경치료를 받고 돌아온 이들이 펼치는 저마다의 무용담을 익히 들었던 터라, 신경치료라는 말만 들어도 뒷목이 저릿저릿했다. 초록창의 지식인 중 누군가는 신경치료의 고통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의사선생님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격'이라 표현했는데, 그걸 보니 글쓴이가 평소 난폭한 사람이길 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워하는 기색을 들키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에, 짐짓 침착한 척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마취주사 이후에는 몰래 흘린 식은땀이 무색할 만큼 별다른 통증 없이 첫날의 치료가 끝났다. 문제는 신경이 잘 제거되었는지 확인하는 다음날이었다. 마취를 안 하는 것을 보니 아플 일도 없나보다 방심하고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삥'

    '삥'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이리 와봐. 처음 본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형이 골목 으슥한 곳으로 불렀습니다. "가진 돈 다 내놔." 나는 그때 칼이 과일 깎는 데만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진짜로 돈이 없었습니다.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다." 그 상투적인 일갈에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필통에 10원짜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걸리면 한 대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백했습니다. "10원짜리 동전 하나밖에 없는데요." 순간의 정적, 그 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찌질하지만 처음으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던 경험입니다. 수십 년이 지나 판사가 된 지금까지도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공놀이

    공놀이

    나는 평화주의자다. 내 자신과도 좀처럼 싸우지 않는다. 고로 하는 운동은 주로 공을 쫓아다니는 일이다. 박민규는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초기 삼미팀의 야구를 두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공놀이도 같은 누명을 쓰기 십상이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 치기 힘든 공도 칠 수 있는 비결을 배우려고 한다.   선생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공을 끝까지 보라"는 것이다. 구기 종목의 첫 번째 덕목이기도 하지만, 내가 유독 잘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내가 공을 끝까지 보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잘 인식하지 못했다. '공을 안 보면 뭘 보고 쳤겠냐'는 식이었다. 그러다 공이 맞아나가는 순간을 목격한 기억이 잘 없다는 것을 알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작은 돈으로 소소한 기쁨을 사는 곳에 들렀다가, 큰 아이가 갖고 싶다던 미니어처 만들기 세트를 사줬다. 조각들을 떼어 침대며 화장대며 소꿉장난 같은 가재도구를 조립하고, 나름의 계획으로 색칠해갔다. 잠시 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누나의 작업에 참가하고 싶었던 5살 막내가 야심차게 의자 하나에 전위적인 채색을 해버렸다. 셋째의 만행을 발견한 딸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동생이 그럴 수도 있지. 칠한 것도 별로 큰 게 아니구만." 나의 말에 첫째는 절규한다. 속상한 건 자기인데 왜 동생 편을 드냐고. 아내가 "우리 딸이 많이 속상했겠구나"하고 등을 토닥이자, 그제서야 딸이 울음을 그친다.   사실 재판을 하다 보면, 마음 속으로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중독

    중독

    어릴 적에는 커피 맛을 몰랐습니다. 대학에 와서야 겨우 자판기 커피를 즐겼는데, 커피 맛보다는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부드럽고 달달한 맛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메리카노에 입문하게 된 것은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와 데이트를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렇게 마시던 것이 언젠가부터 샷을 추가하거나 아예 에스프레소만 마십니다. 하루 3~4잔은 보통이고, 종일 물 대신 커피만 마시는 날도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몸이 건조해졌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두피가 건조해지는 것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커피가 이뇨작용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커피 때문인가 싶어 몇 달 전부터 커피를 끊었습니다. 커피를 끊자 두통이 시작됐습니다. 온종일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커피 대신 두통약을 찾았습니다. 화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힙합

    힙합

    대학 때 친구들은 노래방을 좋아했다. 선후는 모르겠으나 다들 노래도 잘 했다. 반면 나는 음치라는 확고한 자아상이 있었다. 당시 노래방의 암묵적인 규칙은 앉은 순서대로 노래책자를 넘기고 한 곡씩 노래를 예약하는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그 순간이 고역이었다. 내가 택한 고육지책은 랩송을 부르는 것이었다. 어차피 노래를 해도 음정이 맞지 않는다고 하니, 처음부터 음정이 없는 노래를 하면 되지 않겠냐는 무지한 생각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랩을 내레이션처럼 하는 재주가 있다고 넌지시 말하였으나, 나는 그 말이 자제를 요청하는 뜻인 줄 몰랐다. 아무튼 그런 까닭으로, 그 때부터 나의 음악 재생목록에는 항상 힙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힙합 음악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물정

    물정

    성수는 순둥이입니다. 등록금 벌겠다고 몇 달을 밤잠 못 자고 아르바이트했건만 돈을 다 못 받았습니다. 점주에게 떼인 돈이 100만 원입니다. 20년 전 가난한 대학생에게 100만 원은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100만 원에 흥분한 나는 노동청이든 경찰서든 하다못해 동사무소에라도 신고해서 받아주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나는 명색이 법대생이었습니다.   왈수형은 기인(奇人)입니다. 공부 빼고는 모르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없습니다. 축제 때 다들 말리는 데 기어이 불춤을 추다가 학교를 태울 뻔도 했지만, 기죽는 법은 없습니다. 적당히 속물이고, 적당히 현자여서 고민 상담을 하면 늘 사이다 같은 답을 주었지요. 이별에 상심한 후배에겐 "걔는 지금 새 애인이랑 열심히 라면 먹고 있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익숙한 새로움

    익숙한 새로움

    판사의 일주일은 지난 주와 이번 주가 크게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때 방학을 맞아 그린 일과표처럼,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재판, 속행기록 검토, 판결문 작성과 일들이 반복해 채워진다. 주 단위의 재판과 선고를 중심으로 일상이 반복되다보니 시간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법원의 시간은 빠르게 간다.    크게 보면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시간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사건은 다르다. 새로 배당된 신건, 새로 결심된 선고 사건이 있고, 속행 사건도 매번 모습을 바꾸고 나타난다. 그렇지만 항상 새롭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금방이다. 식당에 늘 새로운 손님들이 들고 나는 것처럼, 매주 그만큼의 사건이 드나드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 중에는 어렵거나, 완전히 새로운 유형이거나, 당사자가 특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구속의 기억

    구속의 기억

    화창한 휴일이었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어린 아들과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뒹굴고 놀았습니다. 주말에만 보는 아내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온 가족이 집 근처 공원으로 나섰습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꽃은 지천에 만발했습니다. 날씨와 꽃을 만끽하며 놀았습니다. 모처럼 여유롭고 게으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출근해서 사람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날은 처음 구속영장 당직을 했던 날입니다.   언제나 첫경험은 아찔한 법이지요. 오전 내 가족과 함께 날씨와 꽃을 즐기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사람의 죄를 묻고 구속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사이 숱하게 사람을 구속했지만, 처음 그날의 기억은 여전합니다. 이제는 제법 무디게 일하지만 마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가정재판

    가정재판

    우리 세 아이는 자주 다툰다. 사적 보복과 자력구제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울함은 고발과 진정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엄마가 적합한 관할이라는 건 내 생각이다. 아이들은 보다 강한 응징을 할 것처럼 보여서인지, 분쟁 전문가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빠를 더 자주 찾는다.   이렇게 시작된 재판을 가정재판이라 하자. 가정재판의 절차는 대체로 형사소송의 그것을 준용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피고인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없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원칙에 따라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할 부담을 진다. 자기 잘못을 알아야 행동을 고칠 수 있다는 취지인데, 가끔은 고발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해성사를 하기도 한다. 이 때 불고불리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고, 등장한 모든 사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오지랖

    오지랖

    10살 아들은 정의감이 투철합니다. 남다른 정의감으로 가족부터 지나가던 사람까지 사사건건 참견입니다. 길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에도 분개합니다. 그러니 조카들이 모이는 명절은 늘 극도의 긴장입니다. 형, 동생 구별 없이 사촌들의 작은 잘못 하나, 저와 다른 습관 하나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분란을 무마하기 위해서 저는 조카들 용돈을 두둑이 준비합니다.   이번 명절도 그렇게 무마하고 나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남이야 뭘 하든 신경 말고 너나 잘해라. 사람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게 다르다. 그러니 네 생각을 강요하지 마라. 네가 하는 것은 오지랖이다." 그러자 아들이 반격합니다. "그러면 만날 남들 잘했다, 못했다 재판하고 벌주는 아빠가 나보다 더한 오지랖이네. 자기는 오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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