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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리스트

    들어볼게요

    들어볼게요

    청송(聽訟), 재판은 듣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듣는 귀는 마음에도 있어야 한다. 원고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고 하고, 피고는 원고를 도와주고 사례로 받았다고 한다. 둘은 친구 사이였다. 피고에게 어떻게 돈을 받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더니, 원고가 끼어들어 ‘쟤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며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는 짐짓 부드러운 말로 "들어볼게요" 했는데, 피고는 대답 대신 하소연을 시작했다. 장사도 안 되고 아이 학원비 낼 돈도 없어 너무 어렵다는 말이 이어진다. 결국 내가 "아유 요즘 안 어려운 사람이 있나요. 다 어렵지요. 근데 돈은 어떻게 받았어요?"라며 재촉하고 말았고, 순간 피고는 얼굴을 굳히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첫 변론은 판사 덕분에, 그렇게 싸늘하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모범(?) 재판

    모범(?) 재판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사는 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과 철학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는 객관적인 정답이 없다고들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나 가치관에 따라 롤 모델이 다를 수밖에 없고, 누군가에게는 모범적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인식되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사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누군가의 롤 모델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인생에서 여러 구석들을 후회하면서 아쉬워한다. 그래서 “60이 되어도 몰라요, 이게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인생이 처음 살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아쉬울 수밖에 없어.” 탤런트 윤여정씨가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에서 한 이 발언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어록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평생 한 번 있는 재판

    평생 한 번 있는 재판

    법정 뒷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보라색 카디건을 맵시 나게 입고 다홍빛 립스틱을 곱게 바른 할머니가 조용히 들어와 앉는데, 그 모습이 좋아 시선이 머문다. 할머니의 작은 창고가 경계를 넘었다고 옆 토지 소유 회사가 철거를 청구한 사건이었다. 재판 진행을 마치고, 돌아서는 할머니에게 조심히 가시라고 인사하며 연세를 여쭤봤다. 여든여섯. 너무 고우시다고 했더니, 내내 조용하시던 할머니가 수줍게 뒤돌아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신다. 같이 온 딸이 말한다. "좋은 옷 입고 가야 한다며 아침 내내 골라 입으신 거예요. 판사님 보신다고 화장도 예쁘게 하셨어요. 아흔 평생 처음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바르게 해서 가야 된다고요." 할머니의 그 마음이 참 감사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무슨 마음으로 옷을 골랐을까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손가락 이야기!

    손가락 이야기!

    법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재판 당사자나 대리인의 행동은 아마도 재판 진행이나 판결이 최고였다는 의미에서 해주는 '엄지 척'일 것이다. 원·피고 중 일방이 법관으로부터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제스쳐(법관들이 청각 장애인이나 외국인 등과 같이 언어나 한국말로 소통하기 어려운 사안에서 제스쳐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에) 또한 당신이 재판에서 이겼다는 의미에서 '승소'라는 말과 함께 해주는 '엄지 척'일 것이다. 법관뿐만 아니라 원·피고 쌍방 당사자 모두가 좋아하는 손가락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새끼손가락일 것이다. 쌍방 당사자 간에 조정이 성립된 후 그 조정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의미에서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할 때야 말로 당사자뿐만 아니라 법관까지도 즐거운 순간이기에 새끼손가락은 재판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영화 같은 재판, 게임 같은 재판, 그냥 재판

    영화 같은 재판, 게임 같은 재판, 그냥 재판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검사가 제출하는 녹음파일. 범행 중임이 드러나는 피고인의 뻔뻔한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진다. 이 영화에서는 유죄가 확실하다. 법원에 재판하러 오는 당사자는 이처럼 극적인 결말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치열한 논쟁 가운데 똑 부러지는 판사가 얼른 결론을 콕 찍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일 뿐, 그동안 없던 증거가 소송이 되었다고 짠하고 나타나는 일은 없다.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서류로 작성했지만 중요하고 결정적인 약속은 구두로 했고, 본 사람은 없고, 돈은 현금으로 지급했단다. 판사는 증거를 제출하라고 할 수밖에 없고, 원고는 이런 판사가 야속하다.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면 왜 여기까지 왔겠냐고…. 치밀하게 추궁해서 결정적 증거를 찾는 영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하모와 갯장어

    하모와 갯장어

    가을에는 전어. 그럼 여름은? 부산에 근무하며 알게 되었는데, 여름에는 하모회가 제 맛이다. 지난 여름, 하모 사건을 맡았다. 거래장부가 증거로 제출되었는데 끝까지 넘겨도 하모는 안 보인다. 첫 변론기일, 멀리 남해에서 올라온 원고에게 물었다. 장부에 광어, 전어, 갯장어 등등은 있는데 하모는 없네요 하니까, 원고가 동그란 눈으로 “갯장어가 하모 아닙니꺼…”한다(하모는 갯장어의 일본 이름). 법정에 실소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한숨소리가 들린다. 원고와 피고의 눈에는 불안함,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변호사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듯 부끄러워한다. 재판을 진행하다 보면 좀 속된 표현이긴 하지만 이렇게 탈탈 털리는 날이 있다. 이 날도 그랬다. 하모가 갯장어라는 것이 쟁점은 아니었지만, 저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존경받는 법조인의 기준

    존경받는 법조인의 기준

    젊은 법조인들을 상대로 존경하는 법조인을 꼽으라고 하면 김병로 전 대법원장, 조무제 전 대법관 등을 주로 거론하면서 그 이유로 이 분들이 매우 청렴결백한 분이었다는 점을 꼽는다. 이에 반하여 미국에서는 흑인의 교육받을 권리 등을 인정한 브라운 판결과 체포 시 피의자의 권리를 선언한 미란다 판결을 선고한 얼 워렌 대법원장과,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확립시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선고한 해리 블랙먼 대법관을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많이 꼽는다. 워렌과 블랙먼의 공통점은 공화당 소속의 보수적 대통령들이 이들의 과거 행적으로 미루어 보수적인 내용의 판결을 선고해 줄 것으로 믿고 임명하였는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흑인의 권리 보호와 여성의 권리 보호라는 진보적인 가치를 지지하는 파격적인 판결을 선고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손녀딸의 재판

    손녀딸의 재판

    외할머니에게 나는 첫 손주였다. 첫 손주가 판사가 되었다고 하니 할머니는 그 재판이 무척 보고 싶으셨다. 대구에서 지내시던 할머니는 서울 이모댁에 오시기만 하면 내 재판을 보러 오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매번 나는 "할머니 지금 말고 나중에, 내가 재판 더 잘하게 되면 그 때 오세요"라며 못 오시게 했다. 결국 우리 할머니는 내 재판을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어머니가 가장 속상해 하시는 일이다. 나도 그렇다. 뭐가 그렇게 준비가 안 됐기에 보여드릴 수 없었을까?   선고할 판결문은 다 썼고, 진행할 사건 기록은 미리 검토했고, 제출된 서면과 증거는 놓치지 않고 메모에 빼곡히 기재해 두었다. 재판 전날에는 약속 없이 조용히 보냈고 재판 날에는 더 일찍 출근해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진정한 배려

    진정한 배려

    박시호 님의 편저인 행복편지 10권에는 진정한 배려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등병이 겨울 날 찬물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본 소대장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받아 와서 빨래를 하라"고 시켰고, 이등병은 그 지시를 따랐다가 취사장에 있던 고참에게 얼차려만 받고 돌아와 계속 빨래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중대장이 같은 내용의 지시를 했으나 이등병은 고참의 얼차려가 두려워 지시를 무시하고 그냥 찬물로 계속 빨래를 하였다. 이를 목격한 인사계는 "내가 세수를 하려고 하니 뜨거운 물을 받아와라"고 한 다음 이등병이 취사장에서 물을 받아오자 그 물에 언 손을 녹일 것을 지시해 이등병이 비로소 손을 녹일 수 있었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입장에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뒤끝

    뒤끝

    욱하지만 뒤끝은 없는 그가 이혼 법정에 섰다. 그의 아내는 이십여년 전 폭행의 기억까지 낱낱이 들추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내의 뒤끝을 탓했다. “언제 일인지, 왜 그랬는지 생각도 잘 안나요. 그 때 미안하다고도 했고요. 싸울 때마다 옛날 일까지 모조리 끄집어내니 자꾸 더 싸우게 되죠. 뒤끝이 길어도 어쩌면 저렇게 긴지 모르겠어요. 저는 좀 욱하긴 하지만, 그래도 뒤끝은 없다고요.” 혼인 기간 동안, ‘욱하는’ 그는 종종 집안 살림을 부수거나 아내를 때렸다. 그리고 ‘뒤끝이 없는’ 그는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내를 대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쉽게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는 아내를 ‘꽁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탓하며, ‘뒤끝 없이 화통하고 시원한 성격’인 자신을 좀

    권양희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노력하려는 마음

    노력하려는 마음

    새로 배당된 사건을 대하면 어려운 내용이 많다. 아는 줄 알았는데 들여다볼수록 정확히 알고 있는지 의문일 때도 있다. 재판은 세상과 사람에 관한 일인데, 법 공부 뿐만 아니라 세상 공부와 사람 공부가 부족하여 아는 것만 알고 느끼는 것만 느끼기 때문이다. 어릴 적 Garden은 비싼 고깃집, Park는 여관인 줄만 알았다. 커서는 커피나 와인의 여러 맛을 식별할 줄 알고 남다른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는 것, 비가 오면 울적해지고 야밤에 슬픈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맺히는 것에서 감수성의 징표를 발견했다. 흔하고 쉬워서다. 자연스레 법치주의는 ‘법질서 준수’로, 재판은 법원에 ‘받으러 오는’ 것으로 인식하였기에, 판사가 결론을 ‘내려주면서’ 당사자를 야단치거나 훈계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최기상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마지막 한마디

    마지막 한마디

    엄마이자 아내로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명문대 교수가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 ‘스틸 앨리스(Still Alice)'라는 영화가 있다. 언어학자인 앨리스는 자신이 말을 잃어가고 있음을, 기억과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그로 인해 자신을 잃어가고 있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병의 모습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앨리스는 말한다. “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예전의 나로 남아있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가정법원에는 ‘나’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온다. 

    권양희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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