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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法臺에서 리스트

    구속의 기억

    구속의 기억

    화창한 휴일이었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어린 아들과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뒹굴고 놀았습니다. 주말에만 보는 아내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온 가족이 집 근처 공원으로 나섰습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꽃은 지천에 만발했습니다. 날씨와 꽃을 만끽하며 놀았습니다. 모처럼 여유롭고 게으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출근해서 사람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날은 처음 구속영장 당직을 했던 날입니다.   언제나 첫경험은 아찔한 법이지요. 오전 내 가족과 함께 날씨와 꽃을 즐기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사람의 죄를 묻고 구속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사이 숱하게 사람을 구속했지만, 처음 그날의 기억은 여전합니다. 이제는 제법 무디게 일하지만 마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가정재판

    가정재판

    우리 세 아이는 자주 다툰다. 사적 보복과 자력구제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울함은 고발과 진정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엄마가 적합한 관할이라는 건 내 생각이다. 아이들은 보다 강한 응징을 할 것처럼 보여서인지, 분쟁 전문가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빠를 더 자주 찾는다.   이렇게 시작된 재판을 가정재판이라 하자. 가정재판의 절차는 대체로 형사소송의 그것을 준용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피고인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없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원칙에 따라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할 부담을 진다. 자기 잘못을 알아야 행동을 고칠 수 있다는 취지인데, 가끔은 고발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해성사를 하기도 한다. 이 때 불고불리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고, 등장한 모든 사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오지랖

    오지랖

    10살 아들은 정의감이 투철합니다. 남다른 정의감으로 가족부터 지나가던 사람까지 사사건건 참견입니다. 길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에도 분개합니다. 그러니 조카들이 모이는 명절은 늘 극도의 긴장입니다. 형, 동생 구별 없이 사촌들의 작은 잘못 하나, 저와 다른 습관 하나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분란을 무마하기 위해서 저는 조카들 용돈을 두둑이 준비합니다.   이번 명절도 그렇게 무마하고 나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남이야 뭘 하든 신경 말고 너나 잘해라. 사람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게 다르다. 그러니 네 생각을 강요하지 마라. 네가 하는 것은 오지랖이다." 그러자 아들이 반격합니다. "그러면 만날 남들 잘했다, 못했다 재판하고 벌주는 아빠가 나보다 더한 오지랖이네. 자기는 오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기록 속의 이름

    기록 속의 이름

    법정에 선 피고인은 자꾸만 배시시 웃었다. 우유를 먹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친구를 칼로 찔렀다는 공소사실과, 법정에서 보는 피고인의 해맑음이 형용모순처럼 느껴졌다. 양형조사를 거쳤다. 피고인은 지적장애가 있고, 피고인의 언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몇 년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남은 가족은 관계가 소원해진 동생 한 명과, 20대 중반의 막내동생이 전부였다.    피고인에 대한 양형을 고민하고 있을 때 합의서가 제출되었다. 막내 동생이 상당한 빚을 내서 피해자와 합의하였다고 했다. 동생은 장애가 있는 언니 둘과 함께 살면서 돌볼 계획이니 피고인을 선처해달라고 했다. 동생은 피고인이 초등학생 같은 글씨로 적어냈던 의견서의 가족사항 란에서 본 이름이었다.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악인(惡人)

    악인(惡人)

    김지운 감독의 2010년작 '악마를 보았다'는 정확히 불교 영화입니다. 석가는 불법을 전하겠다는 제자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너의 말을 듣지 않고, 모욕하고, 죽이려 한다면 어찌할 것이냐?" 제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더라도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곧 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석가는 제자의 청을 허락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약혼녀를 살해한 연쇄살인마에게 복수하지만 결국 살인범보다 더 잔혹한 악마가 되어갑니다.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복수를 멈추지 못한 주인공은 끝내 오열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제자와 주인공 모두 내 마음도 언제든지 악(惡)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악(惡)이 어딘가에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거짓말의 기술

    거짓말의 기술

    재판을 하다 보면, 완전히 반대의 사실을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모두 한없이 진실되어 당혹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구의 표정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믿기 어려워, 자연스러운 거짓말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리해본다. 거짓말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지나친 수많은 말들이 있었겠지만, 다른 증거로 인해 나중에 거짓임이 판명되어 미수에 그친 거짓말들이 있다. 그 거짓말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며 이런 기술이 사용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중요한 한 두 가지만을 바꾸는 방법이다. 예컨대 자기 전 막내에게 "양치했니?"라고 물어보면, 막내는 자신 있게 "구석구석 깨끗이 했지!"하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린다. 하지만 구석구석 깨끗이 한 양치는 아침의 일이고(물론 '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공간

    공간

    관리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채무를 조정하고 회사를 살리는 절차를 '회생'이라고 하는데, 이때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을 관리인이라고 합니다. 보통 대표이사가 관리인이 됩니다. 법원에 있으면서 많은 관리인을 봤습니다. 그런데 법원에서 본 관리인들 대부분은 쭈뼛쭈뼛하고, 조리있게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질문을 이해 못 해 답답한 적도 많았습니다. 사업계획은 경영에 무지한 제가 보기에도 판타지 소설 같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지금은 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한 회사의 대표이고,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직원을 책임지는 사람인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회사 현장에서 관리인을 만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사람의 눈빛부터 다릅니다. 눈빛은 반짝거리고 목소리에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인공지능 스피커

    인공지능 스피커

    인공지능 스피커 하나를 들여왔다. 말로 지시를 내리면 스스로 인터넷에 연결해 원하는 답을 준다고 했다. 동봉된 설명서에는 스피커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잘 할 거라는 질문의 목록이 있지만, 아이들이 거기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아이들이 묻고 싶은 걸 물어보니, 스피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날씨를 묻는데 노래를 재생하고, 낱말을 물어보는데 배달주문 메뉴를 읊어대자, 아이들은 "알아듣지도 못한다"는 판정을 내리고는 이내 다른 장난감을 찾아 자리를 떴다.   스피커와 씨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법정에서 당사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떠올린다. 직접 소송을 하는 당사자들 중에는 '법이 없어도 사는 내가 악독한 상대방 때문에 얼마나 고초를 겪어왔는지' 호소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다. 그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 , "(쉼표, 休止符)

    " , "(쉼표, 休止符)

    판결문을 작성하다보면 가끔씩 어떤 부분에 쉼표를 찍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한글맞춤법 사전에서 쉼표의 용례를 찾아보니 10여 가지 정도 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쉼표는 그 중 '끊어 읽는 부분을 나타낼 때'에 대한 것이다. 이 쉼표는 문법의 문제라기보다는 글 쓰는 사람의 의도에 따른 문장 흐름의 구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법관마다 글 쓰는 스타일에 차이가 있다 보니 모두가 느끼는 고민은 아닐 수도 있으나, 쉼표가 있고 없음에 따라 글의 호흡이 달라지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종종 쉼표의 사용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런데 쉼표를 어느 부분에 찍을 것인가는 삶에 있어서, 특히 일을 할 때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라 생각된다. 늘 해오던

    임영철 부장판사 (대구지법 포항지원)
    작법자폐

    작법자폐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는 법가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체계를 법적으로 정비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고 결국은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그와 같이 진나라 체계를 법적으로 정비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자가 바로 상앙이다. 그러나 상앙은 그를 중용하였던 왕이 죽자 실각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상앙은 도망하는 과정에서 그가 만든 '성문은 아침이 되기 전까지는 열 수 없다'거나 '증명서가 없는 자를 재워주어서는 안 된다'는 법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여기서 자신이 만든 법에 자신이 해를 입는다는 뜻의 작법자폐(作法自斃)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상앙은 결국 잡혀 죽임을 당하였고, 그가 만든 연좌제에 따라 삼족이 멸해졌다.   현대에 이르러 법치주의는 국가 운용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노연주 판사 (서울북부지법)
    증거에 대한 斷想

    증거에 대한 斷想

    재판을 하는 입장에서, 보다 명쾌하고 생생한 증거가 제출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늘 있다.   민사재판을 하다보면 일부 내용이 불명확한 계약서가 증거로 제출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당사자들은 "계약체결 당시 구두로 논의한 내용을 고려하면 위 계약서 문구의 해석은 어찌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계약내용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계약서 작성 당시 참여한 제3자를 증인으로 불러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 증인의 진술도 속 시원한 해결책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제3자마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차선책으로 당사자신문을 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명쾌한 해결책은 아니다.   한편으로 형사재판을 하다보면, 요즘은 방범용 CCTV 카메라 및 차량용 블랙박스 설치가 늘어

    임영철 부장판사 (대구지법 포항지원)
    휴정기

    휴정기

    통상 7월 마지막 주, 8월 첫째 주는 법원의 휴정기로, 긴박하게 사건을 진행해야 하는 등의 사정이 없는 한 재판을 진행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재판이 진행되지 않아서 민원인 등 방문자도 눈에 띄게 적어지는데다가 근무자들의 여름휴가기간과 겹치는 탓에 법원은 매우 한적하다. 특히나 평소에도 절간이라고 불리는 판사실은 더욱더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다.    통상 재판기일이 1주일에 1회 진행되는 관계로 법관의 업무는 1주일 단위로 돌아간다. 때문에 요일별로 처리해야 할 일을 정해놓고 그 루틴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수개월이 순식간에 지나 휴정기를 맞는다. 그 때쯤에야 루틴에 따라 업무를 진행하면서 놓쳤거나 따로 시간을 내어 처리하기 어려워 미뤄두었던 업무를 챙겨볼

    노연주 판사 (서울북부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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