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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리스트

    그 삶을 상상하기

    그 삶을 상상하기

    아무리 그래도 집주인인 원고의 행동은 심한 것 같았다. "원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피고가 오죽 답답하면 그랬겠어요?" 자기를 상대방의 상황에 놓고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 보라고 주문해봤다. 그렇다면 법대에 앉아 있는 나는 그렇게 해 보았나? 수많은 타인의 삶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 재판이다. 찰나에 일어난 사건으로 법정에 오게 되었더라도 삶이 아닌 사건은 없다. 마사 누스바움은 책 ‘시적 정의’에서 재판관은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많은 법령과 축적된 판례에서 나온 법리는 객관화된 기준일 뿐, 개인의 삶 하나하나를 설명해내는 공식이 될 수는 없다. 당사자의 주장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삶과 그 사건이 발생한 상황으로 들어가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어둠을 물리치는 새해 태양아 힘차게 솟아라!

    어둠을 물리치는 새해 태양아 힘차게 솟아라!

    판사는 어떤 사실관계를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것을 전해 듣거나, 시간이 지나서 변질되거나 퇴색된 자료들을 종합하여 원·피고나 검사가 주장하는 가설 중 어느 것이 더 맞는지 손을 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직업이다. 사건을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한 당사자 본인조차도 종종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재판에서 인정되는 사실관계가 실제 사실관계와 다르거나 부정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재판이란 천막을 가리고 천막 뒤에 숨어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일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천막이 물건을 가리고 있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천막 뒤에 코뿔소가 숨어 있는데도 다수의 사람들은 코 부분을 간과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자존심 지켜주는 재판

    자존심 지켜주는 재판

    사업주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여러 주장을 하는 원고에게 이건이래서 저건저래서 어려울 것 같다고 설명하며 주장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원고는 차분하게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거의 다 정리되어갈 무렵 요것도 요렇게 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원고는 지금과는 다른 태도로 "판사님, 안 됩니다. 그건 제 자존심입니다"라고 했다. 자존심. 더 이상 그에게 정리하라고 할 수 없는 선이었다. 다 버려도 이거 하나만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지만, 지키며 살기가 쉽지 않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과는 구별해야 한다. 자존심은 스스로 '나'답다고 느끼는 마지노선이다. 충실한 재판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진실과 정의 앞에서 머뭇거렸구나 싶은 순간이 있을 때, 판사로서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칭송받는 정치적인 재판

    칭송받는 정치적인 재판

    미국의 대공황 시대에 빵 한 덩어리를 훔쳐 기소된 노인과 재판장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여 벌금을 대신 내주고, 방청객들에게도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하여 $47.5을 거둬들여 노인을 도와주는 재판을 한 것으로 유명한 라과디아 ‘판사’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 일화에서 라과디아를 ‘판사’로만 칭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 법조인들조차도 라과디아가 ‘판사’로 재직하면서 이 재판을 한 후 그 인기로 3선 뉴욕시장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미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재판은 라과디아가 뉴욕시장으로 재직하던 1935년에 있었고, 당시에는 시장에게 치안판사의 권한도 주어졌는데, 그가 야간 법원을 순회하다가 당직 치안판사를 집에 보내고 대신 재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라과디아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잔인한 법정

    잔인한 법정

    "피고는 원고에게 부동산을 인도하라." 판결을 선고하자, 그 피고는 이 추운 겨울에 어디로 가라는 거냐고 훌쩍인다. 월세를 몇 개월째 연체해서 임대차계약이 해지되었기에 법률상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지만 임대인은 자기도 월세 받아 먹고 살아서 이제 더는 기다려줄 수 없다고 하니, 바람도 시린 겨울날 당장 집을 비우라는 판결을 선고하게 되었다. 다른 사건. 원고는 사랑하는 아들을 건설현장 추락사고로 잃는 끔찍한 일을 겪고, 현장 관리를 소홀히 한 건설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에 왔더니, 건설사의 잘못보다 아들이 현장에서 안전주의의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아들 잘못도 있다는 것이 더 크게 다투어진다. 주변 동료들의 증언, 아들의 모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피더 저지' 최영을 기다리며

    '피더 저지' 최영을 기다리며

    미국 연방항소법원의 판사 중 그들 밑에서 근무한 로 클럭 가운데 연방대법원의 로클럭으로 가장 많이 선발되는 판사를 대법원 로클럭 공급책이라는 의미에서 ‘Feeder judge’라고 부른다. 피더 저지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뛰어난 로 클럭을 잘 선발해서 잘 교육하는 실력이라고 한다.  데이빗 S. 타텔(David S. Tatel) 판사는 2009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대법원에 가장 많은 로클럭을 보낸 10인의 피더 저지 중 한 명으로서, 미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연방판사이기도 하다(리처드 번스타인, 리처드 타이텔만도 시각 장애인인 주 대법관이다).    시각장애인이라는 현실적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차드 포스너를 비롯한 이름난 항소법원 판사들을 제치고 타텔이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재판장의 질문

    재판장의 질문

    가끔 다른 판사의 법정을 방청할 기회가 있는데, 딱딱하고 차가운 방청석 의자에 앉으면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도 이런데 재판 당사자는 얼마나 긴장될까? 그런데 제대로 재판을 하려면 그 긴장은 풀어야 한다. 내가 배석판사일 때 우리 부장님은 이렇게 했다. 복권에 당첨된 피고가 증인석에 앉았다. 원고는 피고와 같이 조합한 숫자대로 복권을 사서 당첨되면 반반씩 나누기로 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첨된 숫자가 그 조합한 숫자라는 점에 대한 마땅한 증거가 없자 피고본인신문을 신청했던 거였다. 피고는 말 한마디로 큰 돈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심하게 떨면서 원고대리인의 질문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그 때 부장님이 하나 물어보겠다며 마이크를 당기셨다. “피고, 이거 아주 중요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법복 대여의 의미

    법복 대여의 의미

    많은 사람들은 법관들이 입는 법복은 법관으로 임용될 때 그 법관의 신체 사이즈에 맞추어 제작된 후 그 법관에게 영구히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고, 심지어 일부 법관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법관 등의 법복에 관한 규칙 제3조에서는 법관에게 법복 1착을 대여하고, 그 대여기간은 재판업무를 수행하는 기간으로 하며, 법관이 대여기간 안에 전직, 퇴직 또는 사망하였을 때에는 법복을 반납하여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2000년 이전에는 그 대여기간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대법원 규칙에서 법관에게 법복을 대여하도록 규정하는 한편 전직, 퇴직 시에는 법복을 반납하도록 한 것은 법복을 통하여 법관에게 부여되는 재판장으로서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법관으로 임명되는 순간 국민으로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들어볼게요

    들어볼게요

    청송(聽訟), 재판은 듣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듣는 귀는 마음에도 있어야 한다. 원고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고 하고, 피고는 원고를 도와주고 사례로 받았다고 한다. 둘은 친구 사이였다. 피고에게 어떻게 돈을 받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더니, 원고가 끼어들어 ‘쟤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며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는 짐짓 부드러운 말로 "들어볼게요" 했는데, 피고는 대답 대신 하소연을 시작했다. 장사도 안 되고 아이 학원비 낼 돈도 없어 너무 어렵다는 말이 이어진다. 결국 내가 "아유 요즘 안 어려운 사람이 있나요. 다 어렵지요. 근데 돈은 어떻게 받았어요?"라며 재촉하고 말았고, 순간 피고는 얼굴을 굳히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첫 변론은 판사 덕분에, 그렇게 싸늘하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모범(?) 재판

    모범(?) 재판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사는 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과 철학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는 객관적인 정답이 없다고들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나 가치관에 따라 롤 모델이 다를 수밖에 없고, 누군가에게는 모범적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인식되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사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누군가의 롤 모델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인생에서 여러 구석들을 후회하면서 아쉬워한다. 그래서 “60이 되어도 몰라요, 이게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인생이 처음 살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아쉬울 수밖에 없어.” 탤런트 윤여정씨가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에서 한 이 발언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어록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평생 한 번 있는 재판

    평생 한 번 있는 재판

    법정 뒷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보라색 카디건을 맵시 나게 입고 다홍빛 립스틱을 곱게 바른 할머니가 조용히 들어와 앉는데, 그 모습이 좋아 시선이 머문다. 할머니의 작은 창고가 경계를 넘었다고 옆 토지 소유 회사가 철거를 청구한 사건이었다. 재판 진행을 마치고, 돌아서는 할머니에게 조심히 가시라고 인사하며 연세를 여쭤봤다. 여든여섯. 너무 고우시다고 했더니, 내내 조용하시던 할머니가 수줍게 뒤돌아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신다. 같이 온 딸이 말한다. "좋은 옷 입고 가야 한다며 아침 내내 골라 입으신 거예요. 판사님 보신다고 화장도 예쁘게 하셨어요. 아흔 평생 처음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바르게 해서 가야 된다고요." 할머니의 그 마음이 참 감사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무슨 마음으로 옷을 골랐을까

    김미경 부장판사 (부산지법)
    손가락 이야기!

    손가락 이야기!

    법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재판 당사자나 대리인의 행동은 아마도 재판 진행이나 판결이 최고였다는 의미에서 해주는 '엄지 척'일 것이다. 원·피고 중 일방이 법관으로부터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제스쳐(법관들이 청각 장애인이나 외국인 등과 같이 언어나 한국말로 소통하기 어려운 사안에서 제스쳐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에) 또한 당신이 재판에서 이겼다는 의미에서 '승소'라는 말과 함께 해주는 '엄지 척'일 것이다. 법관뿐만 아니라 원·피고 쌍방 당사자 모두가 좋아하는 손가락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새끼손가락일 것이다. 쌍방 당사자 간에 조정이 성립된 후 그 조정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의미에서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할 때야 말로 당사자뿐만 아니라 법관까지도 즐거운 순간이기에 새끼손가락은 재판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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