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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술 이야기

    고미술 이야기 리스트

    (69) 추사의 예서(隸書)

    (69) 추사의 예서(隸書)

     동양에 있어서 글자의 시작은 상형문자(象形文字)다. 다르게 도상문자(圖像文字)라고도 한다. 그래서 표의문자가 되었고 일단 그 모양을 보면 그 글자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이 상형문자가 전서(篆書)라는 글씨체의 모체가 되기도 했지만 갑골문자(甲骨文字)의 모체이기도 하다. 상(商)나라(殷나라라고도 부른다)에서 상용되던 갑골문자는 상나라가 망하면서 문자도 같이 살아졌다가 19세기 말에 세상에 다시 나타났고, 상나라 다음인 주(周)나라에서는 전서가 상용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도 전서를 사용했지만 한(漢)나라가 다시 천하를 통일하면서는 또다시 전서에서 예서(隸書)라는 글씨체로 변해갔다. 이 예서의 글씨부터 급속도로 글씨의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8) 순장 바둑판

    (68) 순장 바둑판

    이창호(李昌鎬) 국수가 바둑으로 세계를 몇 년째 제패할 때에는 지금보다도 바둑의 인기가 몇 배나 더 있었다. 지금은 중국에 약간 밀리는 형세지만 또 어떻게 변화가 될지 알 수가 없다. 60~70년대에 일본이 득세할 때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필자도 한 때 바둑에 빠져있을 때 안영이(安玲二: 1934- )선생을 만났다. 안 선생은 젊어서 바둑잡지 기자를 하기도 했지만 필자가 만났을 때는 바둑 관련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필자는 선생을 만나서 큰 감명을 받았다. 우리 바둑 역사에 엄청난 노력을 쏟고 연구와 자료 수집에 몰두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때 선생을 만나면 가장 즐거웠던 일이 우리 전통바둑인 순장(巡將)바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순장바둑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7) 우당 시, 일중 글씨

    (67) 우당 시, 일중 글씨

    글씨란 다른 예술품과 다르게 예술성도 따지지만 내용을 매우 중시한다. 하여 아무리 글씨가 예술성이 뛰어난다 해도 내용이 남을 욕하거나 혹은 제문(祭文) 같은 글인 경우에는 집에 걸어 두기에는 찝찝하고, 또 글씨 쓴 이가 우리 정서에 어울리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예술성과는 무관하게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미술시장에서 다른 미술품과는 다르게 인기도 많이 떨어지고 매매도 덜 이루어진다. 훌륭한 인품까지도 요하는 글씨는 여러 가지로 미술시장에서 인기품목이 되기는 어떻든 쉽지 않다. 얼마 전 어느 경매장에서 본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의 한자 행서 작품은 글씨도 좋지만 내용이 너무 좋아 무조건 구입하게 되었다. 일제 말부터 근년까지 서예계(書藝界)에서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6) 봉래 목판서첩

    (66) 봉래 목판서첩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1584)은 조선 중기 분이지만 이상하게도 초기 사람 같은 생각이 드는 분이다. 아마도 그의 행동거지가 초기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나 북창 정렴(北窓 鄭렴: 1506-1549)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글씨도 같은 시기의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이나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1521-?) 와는 달리 더 오랜 글씨의 느낌이 든다. 이는 지역이나 어울리는 사람의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질적인 탓이 가장 클 것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했던 송설 조맹부(松雪 趙孟?)의 송설체가 매우 생동적이고 활달하여 사람으로 치면 팔등신에다가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어 웬만큼 글씨를 잘 써도 이 분위기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5) 이승만대통령 편지

    (65) 이승만대통령 편지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은 젊어서부터 박사라는 칭호가 항상 따라다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 박사라는 별명 아닌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된다. 사실 이 박사는 1910년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박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 불리게 되었는데, 당시 나이 36세면 그리 빠른 것은 아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편지는 1940년 2월 2일에 이 박사가 미국 워싱톤에서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선생께 보낸 것이다. 1998년에 나온 '이승만문서'에 1939년 이승만에 대한 김구 선생의 답장이 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답장에 대한 답서일 것이다. 이때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등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어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4) 을지문덕전

    (64) 을지문덕전

    필자가 존경하는 인물이 많지만 그 중에서 한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코 단재 신채호(丹齋申采浩: 1880~1936) 선생이다. 아마도 필자가 지금 한학이나 역사나 고미술 언저리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단재선생 때문이리라. 처음에는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라는 몇 편의 논문을 모아놓은 얇은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이 책의 내용이 필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후 선생의 일생과 학문하는 자세, 또 그 살아 움직이는 듯 하는 문장의 맛을 본 이후에는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나 근대인물 중에는 따라갈 자가 없지 않은가 한다. 그리하여 선생의 글이란 글은 거의 찾아 읽었고, 선생에 관한 일화가 하나라도 있으면 스크랩해 놓았으며, 또 그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글을 찾아 읽다 보니 나도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3) 백광훈의 편지

    (63) 백광훈의 편지

    조선중기에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리는 시인이 있었다. 손곡 이달(蓀谷李達: 1539-1612),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이 그들이다. 옛날부터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이라는 관행어가 있었다. 당나라 때에는 시(詩)가 유명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사(詞)가 유명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곡(曲)이 유명하였다는 말인데, 사실은 그런 시나 사를 쓰는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조선은 문명의 혜택이 워낙 미미하여 송사나 원곡은 논할 처지도 되지 못하고 겨우 당시나 송시(宋詩)를 논할 뿐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그 시대에 송시(宋詩)가 인간의 자연스럽고 절실한 감정을 당시(唐詩)만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당시(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2) 십칠가해주금강경

    (62) 십칠가해주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혹은 금강반야경이라고도 하는 금강경은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불교에 입문하는 수행자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이다. 이 경은 인도에 산스크리트 원본이 현재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구마라즙(鳩摩羅什)에 의해 번역서가 나온 이래 현장(玄奬) 등 중국과 한국에서 무수한 주석서가 나왔다. 불교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데 이는 금강경이 다른 경전에 비해 적당한 분량으로 읽기 쉬우면서도 내용이 중국의 유학서(儒學書)나 도가서(道家書)을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중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고 신봉했던 금강경은 중국에서 1303년에 발간된 17명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1) 자하의 석죽도(石竹圖)

    (61) 자하의 석죽도(石竹圖)

    자하 신위의 대나무 그림은 조선 전기의 탄은 이정, 숙종조의 수운 유덕장과 함께 조선시대 가장 대나무를 잘 그리는 화가로 이름이 났다. 이 세분은 모두 전문화가가 아니고 선비화가다. 하여 더 추앙을 받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이 세 사람은 그림의 품격이 현저하게 드러나질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감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 이것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섬세한 면은 탄은이 뛰어나고 다양하고 굳센 면은 수운이 낳고, 가장 부드럽고 여린 대는 자하의 대다. 성격도 그림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수운은 모르지만 탄은과 자하는 글씨도 잘 썼다. 또 시도 잘 했으니, 어떤 이는 조선에서 한 사람의 시인을 꼽을 때 자하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자하는 당시 젊은 시절부터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0) 자하 대련

    (60) 자하 대련

    조선후기에 오면 청나라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새로운 학문의 흡수로 조선 사람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다. 이를 어떤 사람은 실학(實學)이라 하기도 한다. 학문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이 조금씩 변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인이지만 그 당시의 정치가는 모두 학문을 기저에 두고 과거를 통해 출세한 선비들이라 문학이 제일 먼저 반응하였다. 이 중에 문장(文章)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이요, 시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또 글씨는 당연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였다. 자하는 시를 잘할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써서 당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필자는 여기에 하나 더 붙이고 싶은 것이 있으니 바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9)- 추사간찰

    (59)- 추사간찰

    추사가 제주도에서 귀양이 풀려 서울로 돌아와 강상(江上) 즉 용산에 우거할 때인 1849년 11월에, 대흥사에서 주석하고 있던 초의(草衣)와 무주(無住) 두 스님께 보낸 답장 편지다. 아마도 두 스님의 편지가 같은 날에 도착하여 그 기쁜 마음을 표현하며 글을 써 내려 간 듯하다. 초의 스님과는 워낙 친한 사이라 반쯤 농으로 썼지만 무주 스님과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안을 가지고 서로 문답하는 내용이다. 무주스님이 던진 1. 조문도(朝聞道), 2. 무은(無隱), 3. 만상주(萬象主) 세 가지 공안(公案)을 가지고 추사가 답한 편지인데, 추사의 명쾌한 답변을 통해 추사가 불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또 이 글씨는 추사가 제주도 이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추사체의 편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8) 김상옥의 '수석유향지도'

    (58) 김상옥의 '수석유향지도'

    고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평범하나 조금 세월이 지나면 이상하게도 예민해지고 성격도 괴팍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원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드러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필자가 아는 한 사람이 시인이면서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 수집가로도 유명한 분이 있다. 근대 통영이 낳은 시인 초정 김상옥(艸丁 金相沃: 1920-2004) 선생일 것이다. 내 편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미술품, 특히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과 연구, 또는 그에 관한 예찬은 어떤 전문가보다도 더 심하였다. 한걸음 더 나가 글씨도 쓰고 특히 남이 잘 안 쓰는 전서(篆書)에 조예가 깊었고 청자, 백자 그림이나 수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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