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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술 이야기

    고미술 이야기 리스트

    (77) 송준길 한글편지 서첩

    (77) 송준길 한글편지 서첩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이 지난 후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남명학파(南冥學派)와 퇴계학파(退溪學派)가 밀려나고 율곡학파(栗谷學派)가 인조반정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퇴계학파와는 적당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갔다. 이때 즉 17세기에 오면 예학(禮學)으로 인한 학파간의 치열한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상황과 얽여 그 전보다도 더 심한 붕당이 생겨난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 출입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은 이 중요한 시점에 그 중심에서 하나의 큰 기둥 역할을 하였다. 특히 송준길은 퇴계학파의 우복 정경세(愚伏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6) 장홍식 이력서

    (76) 장홍식 이력서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이 어떤 일에든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을 뒤지다 보면, 그 자리에 꼭 그 사람이 있어서 역사의 한 사건이 이루어졌지만 정작 그 당사자의 이력을 찾아보면 생년월일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 소개하려는 서은 장홍식(西隱 張鴻植: 1864~1940?)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구한말에 내각(內閣) 주사(主事)를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장홍식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될 때 규장각(奎章閣) 서리(胥吏)로 있다가 규장각이 1926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할 때까지 실무책임자로 규장각 도서를 관리 했던 사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5) 동상연의

    (75) 동상연의

          동산연의(東廂演義)란 1책 짜리 선장본(線裝本)이 필자의 서가에 곱게 모셔져 있다. 서지적 사항은 이렇다. 겉표지는 ‘동산연의’라 되어있고 책 표지를 넘기면 ‘동산기인(東床記引)’이 1장 있고, 다음 장에 ‘전(傳), 아정 이덕무무관 저(雅亭李德懋懋官 著),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이란 제하에 6장에 걸쳐 전의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는 ‘동상기(東床記), 완산 이각 저(完山 李珏 著)’란 제하에 서상기식 연극체제의 한문 글이 또 19장에 걸쳐 쓰여 있다. 글씨도 개성 있고 내용도 재미있어 틈틈이 꺼내 보며 저자는 누구이며 누구의 글씨일까 항상 궁금하였는데 아직도 그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여러 사전을 참고하면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1791(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4) 통례원계회도

    (74) 통례원계회도

            지금 전해져 오는 그림 중에 16세기에 유행했던 계회도(契會圖)를 보면, 집단 이기주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16세기에 들어서 이상하게도 계회도가 유행한다. 그 전에도 계회(契會)가 많이 있었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그림으로 전해오는 것은 거의 없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산수화로 전하는 작품이 없기 때문에 이 계회도의 그림을 보면 중국의 영향이 당연히 보이지만 그 나름의 특징이 있다.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에도 별로 없는 아니 거의 없는 형식이다. 전체를 삼단으로 구분하여 상단에는 대부분 전서(篆書)로 계회도의 정식 명칭을 적고, 중단에는 계회 장면을, 하단에는 그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좌목(座目)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3) 소고서첩

    (73) 소고서첩

    옛날 글씨를 구경하다 보면 의외의 즐거움이 종종 있다. 이래서 한 취미가 큰 수장가로 바뀌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연히 지방에 같다가 어느 서점에 들렸더니 서가에서 오래된 글씨 첩을 하나 꺼내 보여 주는데 제첨은 『학록필첩(鶴鹿筆帖)』으로 되어있다. 학록이란 어떤 사람의 호일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내용을 보니 백하(白下) 아니면 원교(圓嶠)의 글씨가 분명 할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흥정을 했다. 잘 알지 못하는 골동가게에서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 여겨 흥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지도 없고 내용도 당시(唐詩)를 쓴 것이라 그리 큰 값이 나갈 첩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주인도 그리 생각하여 적당한 값을 내고 샀다. 서울로 오는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2)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49

    (72)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49

    법화경의 마지막 품인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에 보면 “어지러운 세상에 법화경을 받아 지니면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와서 수호한다. 다만 수지(受持)하거나 쓰기(寫經)만 하여도 온갖 공덕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신라시대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사경(寫經)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경은 신라시대에도 유행했지만 고려시대에는 더욱 성행하였으며 조선말기까지도 그 명맥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 초기에 쓴 사경은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없고 고려후기 즉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 때 제작된 것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고려후기에 팔만대장경과 같이 나라의 평화와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경에 대한 공덕이 컸기 때문에 제작수량이 더욱 많아졌다. 그리하여 왕실에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1) 봉서(封書)

    (71) 봉서(封書)

    옛 글에 봉서별감(封書別監)이란 말이 종종 보인다. 하면 봉서와 관련된 직책일 것인데 알지 못하여 쩔쩔 매다가 조선시대 궁중 일에 대해서 해박하다는 어른을 만나서 알게 된 일이 있다. 별감이란 말은 궁중에 일하는 사람만이 쓰는 직책이란 것은 알 수 있지만 봉서(封書)란 말은 쉽게 알기 어렵다. 봉서의 원뜻은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투 겉면 이음새에 풀칠을 한 후 근봉(謹封)이나 봉(封)이란 글자를 쓰면서 생긴 단어인데, 어느 순간부터 임금이 일가 친척(宗親)이나 가깝게 지내는 신하에게 내리는 편지나, 왕비가 친정 식구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하여간 사가(私家)와 달리 왕가(王家)에서는 특별히 쓰는 용어가 일반에서 쓰는 용어와 차이가 커서 일반인은 따로 배우지 않으면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0) 이재시축

    (70) 이재시축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평생지기는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이다. 권돈인은 문과출신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로, 시를 잘하였고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 그는 구양순(歐陽詢)풍의 글씨를 본받아 어떤 글씨는 추사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이는 일생 동안 교유한 결과일 것이다. 추사의 문집을 보면 편지 왕래도 제일 많았고 글씨, 그림, 시평 등 다방면에 대해 동지 이상의 신교(神交)였다. 하지만 문집이 전하질 않아 권돈인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 자세치 않은 부분이 많다. 이 이재시축(彛齋詩軸)은 1857년 초 여름, 즉 추사가 돌아가신 지 6개월 후쯤에 쓴 것으로 추정한다.권돈인이 추사의 제자 희원 이한철(希園 李漢喆)이 그린 대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9) 추사의 예서(隸書)

    (69) 추사의 예서(隸書)

     동양에 있어서 글자의 시작은 상형문자(象形文字)다. 다르게 도상문자(圖像文字)라고도 한다. 그래서 표의문자가 되었고 일단 그 모양을 보면 그 글자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이 상형문자가 전서(篆書)라는 글씨체의 모체가 되기도 했지만 갑골문자(甲骨文字)의 모체이기도 하다. 상(商)나라(殷나라라고도 부른다)에서 상용되던 갑골문자는 상나라가 망하면서 문자도 같이 살아졌다가 19세기 말에 세상에 다시 나타났고, 상나라 다음인 주(周)나라에서는 전서가 상용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도 전서를 사용했지만 한(漢)나라가 다시 천하를 통일하면서는 또다시 전서에서 예서(隸書)라는 글씨체로 변해갔다. 이 예서의 글씨부터 급속도로 글씨의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8) 순장 바둑판

    (68) 순장 바둑판

    이창호(李昌鎬) 국수가 바둑으로 세계를 몇 년째 제패할 때에는 지금보다도 바둑의 인기가 몇 배나 더 있었다. 지금은 중국에 약간 밀리는 형세지만 또 어떻게 변화가 될지 알 수가 없다. 60~70년대에 일본이 득세할 때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필자도 한 때 바둑에 빠져있을 때 안영이(安玲二: 1934- )선생을 만났다. 안 선생은 젊어서 바둑잡지 기자를 하기도 했지만 필자가 만났을 때는 바둑 관련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필자는 선생을 만나서 큰 감명을 받았다. 우리 바둑 역사에 엄청난 노력을 쏟고 연구와 자료 수집에 몰두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때 선생을 만나면 가장 즐거웠던 일이 우리 전통바둑인 순장(巡將)바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순장바둑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7) 우당 시, 일중 글씨

    (67) 우당 시, 일중 글씨

    글씨란 다른 예술품과 다르게 예술성도 따지지만 내용을 매우 중시한다. 하여 아무리 글씨가 예술성이 뛰어난다 해도 내용이 남을 욕하거나 혹은 제문(祭文) 같은 글인 경우에는 집에 걸어 두기에는 찝찝하고, 또 글씨 쓴 이가 우리 정서에 어울리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예술성과는 무관하게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미술시장에서 다른 미술품과는 다르게 인기도 많이 떨어지고 매매도 덜 이루어진다. 훌륭한 인품까지도 요하는 글씨는 여러 가지로 미술시장에서 인기품목이 되기는 어떻든 쉽지 않다. 얼마 전 어느 경매장에서 본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의 한자 행서 작품은 글씨도 좋지만 내용이 너무 좋아 무조건 구입하게 되었다. 일제 말부터 근년까지 서예계(書藝界)에서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66) 봉래 목판서첩

    (66) 봉래 목판서첩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1517-1584)은 조선 중기 분이지만 이상하게도 초기 사람 같은 생각이 드는 분이다. 아마도 그의 행동거지가 초기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나 북창 정렴(北窓 鄭렴: 1506-1549)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글씨도 같은 시기의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이나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1521-?) 와는 달리 더 오랜 글씨의 느낌이 든다. 이는 지역이나 어울리는 사람의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질적인 탓이 가장 클 것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했던 송설 조맹부(松雪 趙孟?)의 송설체가 매우 생동적이고 활달하여 사람으로 치면 팔등신에다가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어 웬만큼 글씨를 잘 써도 이 분위기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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