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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이순신 신도비문 탁본

    (82) 이순신 신도비문 탁본

    정조의 명에 의해 세운 이순신 장군의 신도비의 비문 탁본첩이다.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그의 신도비를 세울 것을 명했는데, 이 때 친히 글을 짓고 이순신의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후손에게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송나라 부필(富弼)의 묘비 제목을 전서로 썼던 예에 따라 이 신도비의 제목도 전서로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 친히 쓰고 내용의 글은 정조가 친히 지었다. 글씨는 안진경의 가묘비(家廟碑)에서 글자를 집자하였다. 안진경은 당나라 때의 명필이자 국가를 위해 충절을 다했던 명신으로, 안진경의 글씨를 비문에 사용함으로써 더욱 이순신의 충정을 빛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비는 현재 충남 아산의 충무공 묘소 앞에 서 있다. 1693년에 김육(金堉)이 지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81) 백하서첩(白下書帖)

    (81) 백하서첩(白下書帖)

    백하서첩은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의 크고 작은 해서, 행서, 초서로 된 글씨 모음집이다. 백하의 글씨 중에 이만큼 다양하게 쓴 서첩은 드물다. 보물로 지정된 고시서축(古詩書軸)도 다양하기는 이 서첩을 따를 수 없고 그 대신 표암(豹菴 姜世晃: 1713-1799)이나 이계(耳溪 洪良浩: 1724-1802) 등의 발문이 붙어 있어 백하 글씨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은 되지만 이 첩은 두 군데 씌어 있는 관지와 글씨를 부탁한 사람에게 보낸 서찰이 붙어 있어 받은 사람과 쓰게 된 동기를 알 수 있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백하는 윤순의 호이다. 그는 자가 중화(仲和), 본관은 해평으로, 유명한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 1533-1601)와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 형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80) 옥동서첩

    (80) 옥동서첩

    옥동 이서(玉洞 李溆: 1662-1723)는 조선 후기 우리 글씨가 한번 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중국이론에 맞서 주역(周易)의 음양원리를 중심으로 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신, 즉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미적으로 들어난 형태가 바로 글씨라는 독창적인 서예이론인 『필결(筆訣)』을 저술한 걸출한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옥동은 당신의 이론에 맞게 글씨를 썼지만 어려서는 가정에서 아버지인 매산 이하진(梅山 李夏鎭: 1628-1682)에게서 기본적인 학문과 글씨를 익혔다. 이 여주 이씨(驪州 李氏) 옥동가의 글씨는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1512-1575)의 영향을 받은 청선 이지정(聽蟬 李志定: 1588-?)으로 전해지는 글씨의 명가이고 청선의 조카가 바로 매산이다. 특히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9) 안중근 의사 글씨

    (79) 안중근 의사 글씨

      2017년 겨울 K옥션 메이저 경매에 나오는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세심대(洗心臺)’ 세 글자를 보면서 얼마 전 평소에 존경하던 김석주(金錫胄)선생의 부탁으로 그 분의 중·고등학교 은사이신 길영희(吉瑛羲: 1900~1984)선생 유작전시 팸플릿에 쓴 글이 생각났다. 그 글을 선생님이 어찌나 칭찬을 하시던지 몸 둘 바를 모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글씨는 ‘좋은 글씨’와 ‘잘 쓴 글씨’가 있을 뿐인데 길 선생님의 글씨는 ‘좋은 글씨’라는 내용 때문일 것이다. 요즘 와서 자꾸 이 두 가지 글씨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세상에 잘 쓴 글씨는 많다. 그러나 좋은 글씨는 얼마나 될까? 그러면 잘 쓴 글씨와 좋은 글씨를 다 갖춘 글씨는 어떤 글씨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8) 사명대사 글씨

    (78) 사명대사 글씨

    일반 사람이 출가를 하면 본래의 성명은 버리고 불가의 이름을 쓴다. 사명당(四溟堂: 1544-1610)은 당호며 호는 송운(松雲) 이름은 유정(惟政), 속명은 임씨(任氏)다. 사명대사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1599년에 직지사에서 출가하여 나중에는 휴정 서산대사의 의발 제자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의병승을 모아 스승을 따라 의병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중에도 1593년 명나라 군대와 같이 평양성 탈환 전투, 그 뒤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의 네 차례에 걸친 회담 등은 스님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건이었다. 특히 1604년 초 스승 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선조의 부탁으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7) 송준길 한글편지 서첩

    (77) 송준길 한글편지 서첩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이 지난 후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남명학파(南冥學派)와 퇴계학파(退溪學派)가 밀려나고 율곡학파(栗谷學派)가 인조반정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퇴계학파와는 적당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갔다. 이때 즉 17세기에 오면 예학(禮學)으로 인한 학파간의 치열한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상황과 얽여 그 전보다도 더 심한 붕당이 생겨난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 출입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은 이 중요한 시점에 그 중심에서 하나의 큰 기둥 역할을 하였다. 특히 송준길은 퇴계학파의 우복 정경세(愚伏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6) 장홍식 이력서

    (76) 장홍식 이력서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이 어떤 일에든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을 뒤지다 보면, 그 자리에 꼭 그 사람이 있어서 역사의 한 사건이 이루어졌지만 정작 그 당사자의 이력을 찾아보면 생년월일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 소개하려는 서은 장홍식(西隱 張鴻植: 1864~1940?)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구한말에 내각(內閣) 주사(主事)를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장홍식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될 때 규장각(奎章閣) 서리(胥吏)로 있다가 규장각이 1926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할 때까지 실무책임자로 규장각 도서를 관리 했던 사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5) 동상연의

    (75) 동상연의

          동산연의(東廂演義)란 1책 짜리 선장본(線裝本)이 필자의 서가에 곱게 모셔져 있다. 서지적 사항은 이렇다. 겉표지는 ‘동산연의’라 되어있고 책 표지를 넘기면 ‘동산기인(東床記引)’이 1장 있고, 다음 장에 ‘전(傳), 아정 이덕무무관 저(雅亭李德懋懋官 著),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이란 제하에 6장에 걸쳐 전의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는 ‘동상기(東床記), 완산 이각 저(完山 李珏 著)’란 제하에 서상기식 연극체제의 한문 글이 또 19장에 걸쳐 쓰여 있다. 글씨도 개성 있고 내용도 재미있어 틈틈이 꺼내 보며 저자는 누구이며 누구의 글씨일까 항상 궁금하였는데 아직도 그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여러 사전을 참고하면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1791(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4) 통례원계회도

    (74) 통례원계회도

            지금 전해져 오는 그림 중에 16세기에 유행했던 계회도(契會圖)를 보면, 집단 이기주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16세기에 들어서 이상하게도 계회도가 유행한다. 그 전에도 계회(契會)가 많이 있었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그림으로 전해오는 것은 거의 없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산수화로 전하는 작품이 없기 때문에 이 계회도의 그림을 보면 중국의 영향이 당연히 보이지만 그 나름의 특징이 있다.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에도 별로 없는 아니 거의 없는 형식이다. 전체를 삼단으로 구분하여 상단에는 대부분 전서(篆書)로 계회도의 정식 명칭을 적고, 중단에는 계회 장면을, 하단에는 그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좌목(座目)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3) 소고서첩

    (73) 소고서첩

    옛날 글씨를 구경하다 보면 의외의 즐거움이 종종 있다. 이래서 한 취미가 큰 수장가로 바뀌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연히 지방에 같다가 어느 서점에 들렸더니 서가에서 오래된 글씨 첩을 하나 꺼내 보여 주는데 제첨은 『학록필첩(鶴鹿筆帖)』으로 되어있다. 학록이란 어떤 사람의 호일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내용을 보니 백하(白下) 아니면 원교(圓嶠)의 글씨가 분명 할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흥정을 했다. 잘 알지 못하는 골동가게에서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 여겨 흥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지도 없고 내용도 당시(唐詩)를 쓴 것이라 그리 큰 값이 나갈 첩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주인도 그리 생각하여 적당한 값을 내고 샀다. 서울로 오는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2)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49

    (72)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49

    법화경의 마지막 품인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에 보면 “어지러운 세상에 법화경을 받아 지니면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와서 수호한다. 다만 수지(受持)하거나 쓰기(寫經)만 하여도 온갖 공덕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신라시대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사경(寫經)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경은 신라시대에도 유행했지만 고려시대에는 더욱 성행하였으며 조선말기까지도 그 명맥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 초기에 쓴 사경은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없고 고려후기 즉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 때 제작된 것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고려후기에 팔만대장경과 같이 나라의 평화와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경에 대한 공덕이 컸기 때문에 제작수량이 더욱 많아졌다. 그리하여 왕실에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71) 봉서(封書)

    (71) 봉서(封書)

    옛 글에 봉서별감(封書別監)이란 말이 종종 보인다. 하면 봉서와 관련된 직책일 것인데 알지 못하여 쩔쩔 매다가 조선시대 궁중 일에 대해서 해박하다는 어른을 만나서 알게 된 일이 있다. 별감이란 말은 궁중에 일하는 사람만이 쓰는 직책이란 것은 알 수 있지만 봉서(封書)란 말은 쉽게 알기 어렵다. 봉서의 원뜻은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투 겉면 이음새에 풀칠을 한 후 근봉(謹封)이나 봉(封)이란 글자를 쓰면서 생긴 단어인데, 어느 순간부터 임금이 일가 친척(宗親)이나 가깝게 지내는 신하에게 내리는 편지나, 왕비가 친정 식구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하여간 사가(私家)와 달리 왕가(王家)에서는 특별히 쓰는 용어가 일반에서 쓰는 용어와 차이가 커서 일반인은 따로 배우지 않으면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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