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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김상옥의 '수석유향지도'

    (58) 김상옥의 '수석유향지도'

    고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평범하나 조금 세월이 지나면 이상하게도 예민해지고 성격도 괴팍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원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드러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필자가 아는 한 사람이 시인이면서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 수집가로도 유명한 분이 있다. 근대 통영이 낳은 시인 초정 김상옥(艸丁 金相沃: 1920-2004) 선생일 것이다. 내 편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미술품, 특히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과 연구, 또는 그에 관한 예찬은 어떤 전문가보다도 더 심하였다. 한걸음 더 나가 글씨도 쓰고 특히 남이 잘 안 쓰는 전서(篆書)에 조예가 깊었고 청자, 백자 그림이나 수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7) 전주최씨 지천가 서첩

    (57) 전주최씨 지천가 서첩

    이 첩은 전주최씨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과 그의 아들 후량(後亮: 1616-1693), 손자 석진(錫晉: 1640-1690), 증손 창헌(昌憲), 고손 수철(守哲: 1683-1712)까지 5대에 걸친 서간첩이다. 알다시피 지천은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 활동하여 호란의 뒷수습뿐 만 아니라 많은 치욕을 당하면서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여 한 일이나, 당시 대명의리(大明義理)에 눌려 많은 마음고생을 한 분이다. 하여 척화파인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생을 하였다. 그 뒷바라지를 한 아들 후량과 동생 혜길(惠吉: 1591-1662)의 편지 속에 이런 상황이 나타난다. 지천이 7통, 최혜길 1통, 최후량 6통,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6) 안염첩

    (56) 안염첩

    이 첩은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가 1806년 봄 평안도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갈 때 선후배 제자 등이 써준 전별 시문집이다. 표지에 암연이라 되어 있는데 이는 이별할 때의 서운함을 나타내는 글자로 우리말로는 '아득하다'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은 교통의 불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멀리 여행을 하거나 지방으로 벼슬살이를 떠나거나 할 때는 선후배나 친구 들이 모여 전별의 자리를 만든다. 이를 '전별연(餞別宴)'이라 한다. 잠깐 여행에도 이런 전별연이 있을 정도이니 중국으로 사신으로 나가거나 일본으로 통신사 행렬에 끼이게 되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첩에는 총 21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집두(李集斗: 1744-1820), 이복현(李復鉉: 176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5) 유하계마도

    (55) 유하계마도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 선생이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 강경 대북파가 주도한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가 광해 10년, 즉 1618년 정월 9일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많은 친지와 문인 들이 찾아와 전송을 하였다. 그 중 아끼던 문인인 북저 김류(1571-1648)에게 여기에 소개하는 유하계마도(柳下繫馬圖)를 주고 벽상(壁上)에 걸어놓을 것을 부탁하였다. 김류는 1620년 이귀 등과 광해군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1623년 반정을 도모할 때 거의대장(擧義大將)으로 참여하여 성공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인조반정이라 부른다. 이 때 왕으로 추대된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반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4) 석애 기행시집

    (54) 석애 기행시집

    조선 후기에 오면 자주 외척의 세도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나라 어느 시대인들 정치를 하게 되면 끼리끼리 뭉쳐서 나라의 이득이 되든 개인의 이득이 되든 이득에 따라 어울리는 무리는 항상 있어 왔고 또 정치란 그런 것이라며 당연시 되었다. 한데 조선후기 즉 1800년부터 고종이 등극하던 1864년까지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독단 세도가 너무나 심했기에 외척세도란 말이 항상 따라다녔다. 이때 안동김씨 60년 세도에 잠깐 대항했던 외척세도가가 석애 조만영(石厓 趙萬永: 1776-1846)이었다. 석애의 누이동생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나중에 翼宗으로 추존: 1809-1830)의 비이자 조대비(趙大妃: 1808-1890)라 부르던 분이다. 석애는 동생이자 정치의 동반자였던 운석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3) 죽남서첩

    (53) 죽남서첩

    조선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은 병자호란의 치욕인데 그 당사자들은 어떠하였겠는가하는 생각을 하면 마냥 서글퍼진다. 이 당사자들 중에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삼전도 비문(三田渡 碑文: 三田渡淸太宗功德碑)을 쓴 죽남 오준(竹南 吳竣: 1587-1666)일 것이다. "오준의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 본관은 동복(同福), 만취 오억령(晩翠 吳億齡)의 조카며, 선조 20년 정해(丁亥)년, 즉 1587년에 태어났고, 광해 무오년, 즉 161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사자관(寫字官)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오준은 "글을 잘하고 글씨도 잘 써서 삼전도비의 글씨를 썼으니, 그로 인해 한을 품고 죽었다"는 기록은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2) 한거첩

    (52) 한거첩

    어떤 경매의 미리보기에 갔다가 우연히 이 그림을 구경하다 그림보다도 그 앞에 쓴 글이 마음에 들어 후에 경매에 응찰하여, 결국 내 사무실에 걸어 두고 보는 그림이 바로 이 한거첩(閑居帖)이다. 작가가 누구인지 아직 밝히지는 못했지만 오는 사람마다 각기 자기 나름의 의견을 내놓아 한 켠으로는 재미도 있다. 그 그림속의 인물이 꼭 연객(煙客; 許?)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똑같다는 둥, 그 나무의 모습은 단원(檀園: 金弘道)의 필치와 비슷하다고 하는 분도 있다. 이 앞에 쓴 제기(題記)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하곡(荷谷) 옛집에 한가히 쉴 때에 의재(宜齋)가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와서 틈이 있을 때 그림을 그려 달라 청한다. 생각하니 내 나이 13~14세 때부터 우연히 이 일(그림)을 익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1)  메트르

    (51) 메트르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는 근대 지식인으로 교육자이자 철학자이다. 요즈음 동양학과 인문학이 무슨 운동선수 이름처럼 마구 불러지는 세상에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도덕적이고 건강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던, 참으로 조선의 선비에다 서양 철학자 칸트와 같은 행동 규범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신 스스로 너무나 철두철미한 삶을 살았던 그런 분이었다. 다석 선생은 생각이 양의 동서를 마음대로 넘나들었고 어려서 한학을 기본으로 익힌 연후에 한글연구에도 힘을 써서 원초적인 한글, 즉 훈민정음 초기의 어법을 마음대로 구사해 일기와 글을 썼고,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영향를 받아 기독 성경연구를 독자적으로 한 근대의 유, 불, 선, 기독의 통섭적 경향의 사상을 일원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50) 용대별집(容臺別集)

    (50) 용대별집(容臺別集)

    필자가 매우 아끼는 책 중에 명나라 말기 동기창(董其昌;1555-1636)의 문집인 "용대별집(容臺別集)" 1책이 있다. 청나라 초기에 동기창의 큰 손자인 동정(董庭)이 편집하고 제자인 서사굉(徐士?)이 교열한 4권 1책(1권: 隨筆, 禪悅, 雜紀. 2권: 書品. 3권: 書品. 4권: 畵旨)으로 편차(編次)한 이 책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손때가 묻은 책(手澤本)이다. 이 책이 추사의 서재에 언제 비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을 추사가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책의 표제 글씨가 추사의 글씨이며, 중간 중간에 추사의 인장이 무려 35방이나 찍혀 있어서이다. 명말 청초 최고의 서화이론가이자 화가이며 서예가인 동기창, 그는 조선후기 우리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49) 유길준의 자작시 한 수

    (49) 유길준의 자작시 한 수

    구당 유길준(矩堂 兪吉濬: 1856-1914)하면 누구든지 먼저 서유견문(西遊見聞)이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서유견문이 근대 우리 지식인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유길준이 1883년 7월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수행원으로 도미(渡美), 1884년 가을 덤머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공부 중에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의 소식을 듣고 12월 학업을 중단,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에 1885년 12월 귀국한다. 오자마자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과 같은 개화파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포도청에 구금된다. 그러나 당시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의 도움으로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48) 석재그림

    (48) 석재그림

    우연히 경매장에 나온 7폭짜리 석재화첩을 보고 옛날 석재 전시회에서 본 국화그림 화제를 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던 일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는 근대 인물 중에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다. 나라가 망하면 큰 재목이 그 인물값을 하질 못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으면 대부분 노름에 빠지거나 음주에 빠져 일생을 허비한다. 하지만 개중에는 한의(韓醫)나 서화로 세월을 보낸 분들도 있다. 석재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화에다 마음을 두어 대구의 근대 전통 서화의 한 획을 그었다. 석재의 재주는 당대에 이름이 나서 대원군이 직접 불러 어전에서 즉석 휘호를 시켜 그의 실력을 검증하고 석재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하고, 중국에 가서는 손문(孫文)을 만나 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47)동계매첩

    (47)동계매첩

      조선후기에 오면 지식인들의 사고가 많이 달라진다. 이는 여러 가지 계기가 있겠지만 특히 청나라를 통한 새로운 학문과 문물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하여 특이한 형태의 문학작품이나 새로운 화풍의 그림이 나오기도 하여 다양하게 여러 방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생활이 풍족한 것은 아니나, 꽉 막혀있던 지식인의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되어 삶이 약간은 여유가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 중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각자의 좋아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데 있어 크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금보다도 더 전문적인 어떤 곳에 빠져 책을 내거나 그림이나 글씨로 이를 표현하였다. 연암의 글이나 겸재의 그림, 추사의 글씨가 그런 것 중에 하나다. 이런 현상 중에 하나가 버들개지(柳絮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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