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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술 이야기 리스트

    (22) 죽장첩

    (22) 죽장첩

    우리 서화계는 유달리 이름 있는 작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 이는 자기의 안목으로 서화를 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남의 안목을 빌어서 사기 때문이다. 모든 골동이 마찬가지 현상이지만 필자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남의 안목을 빌려서 사야 한다. 이때 도움을 받는 분이 누구냐에 따라 유명한 수장가가 되느냐 그렇지 않은가가 결정될 수 있다. 어느 분야든지 사람을 잘 만나야 성공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사가면서 관계되는 사람도 만나고 전시회도 가보고 책도 사보면서 차츰차츰 자기의 안목을 길러 나가기 시작한다. 이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조금 안목이 트인다 싶으면 이 세상에 나만큼 잘 보는 사람이 없는 듯이 나도 모르게 오만해진다. 보통은 10여년 쯤 사다 보면 이런 상황이 온다고 한다. 이때 이 고비를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1) 추사의 '진흥북수고경'

    (21) 추사의 '진흥북수고경'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1848년12월6일 제주 유배가 풀려 1849년1월 서울에 온지 겨우 2년 반이 되지 않은 1851년7월22일 다시 함경도 북청 땅으로 유배를 받았다. 당시 진종(眞宗; 사도세자의 형. 후에 추존하여 진종이고 철종이 진종의 왕통을 이음)의 조천에 관한 예론에서 친구인 권돈인(權敦仁; 1783-1859)과 같이 진종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가게 된 것이다. 9년여의 제주도 귀양생활에 이골이 난 추사로서 정반대인 북청에 가게 되었으니 마음이 오죽했으랴. 더군다나 당신뿐 만 아니라 형제가 모두 가진 것이 전무한 상태였으니 더더욱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때의 심정이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동쪽에서 꾸고 서쪽에서 얻어 북청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0) 강산여화

    (20) 강산여화

    추사 김정희란 분은 연구하면 할수록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그 중 하나가 글씨를 가르쳐준 사람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 조금만 가르쳐줘도 매우 생색을 내는 요즘과 그 예전에는 전혀 다르기도 하였겠지만 추사라는 분은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는 그 시퍼렇던 계급사회에서도 계급에 전혀 관계치 않고 상민이거나 중인이거나 또는 나이가 당신보다 많아도 배우겠다면 항상 문을 열어놓았던 분이다.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분에게는 제자라는 표현은 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당시 평양에서 글씨로 이름을 날린 조광진(曺匡振: 1772-1840)은 추사를 만나면서 그 글씨의 품격이 크게 달라졌다. 추사와 조광진이 언제 서로 알게 되었는지는 미상이나,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金魯敬: 1766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9) 다산과 하피첩

    (19) 다산과 하피첩

    KBS 진품명품에 출연한 지 1년쯤 되었을 때인 2006년 3월초, 사진으로 의뢰가 온 세 첩의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글씨가 틀림없는 '하피첩'(사진)이었다. 이 첩의 내용은 다산의 문집에는 가계(家誡)란 제목으로 실려 있지만 친필로 쓴 것으로는 처음 세상에 얼굴을 비치는 귀중한 유물이다. 방송국에서 의뢰인에게는 다산 친필글씨라는 것을 미리 밝히지 말고 방송하기로 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이자, 실학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인 다산의 각별한 가족사랑은 여러 글에 절절이 나타난다. 하지만 하피첩만큼 로맨틱한 역사가 숨쉬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다산이라는 인물 자체도 역사의 한 가운데에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8) 김범부 초상

    (18) 김범부 초상

    1992년쯤인가 귀티가 나는 중년 부인께서 인사동 있던 문우서림에 들어오신다.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니 아는 분이시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보자기에 싸가지고 온 족자 하나를 꺼내어 보여 주신다. 바로 범부 김정설(凡夫 金鼎卨;1897-1966)의 초상화(캐리커처·사진)다. 범부선생은 소설가 동리 김시종의 친형으로, 동서양 사상에 능통하였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린 이는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1904-1967)이라고 하는데 보는 순간 근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족자는 범부선생과 가장 친하게 지내시던 당신의 남편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이젠 범부선생 가족과는 연락도 되질 않고 남편도 멀리 떠났고 그린 사람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7) 도상주역(圖像周易)

    (17) 도상주역(圖像周易)

    우리나라는 인쇄술이 매우 발달하였다. 목판본이든 활자본이든 책을 만들려면 일단 글을 지어야만 된다. 좋은 글이 있다 해도 그 글이 모두 목판이나 활자본으로 출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와 글의 내용과 실용성, 경제적 비용 등 요즘 우리가 내는 책보다도 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여려 사람이 볼 수 있는 출판물이 나온다. 이 중에 하나라도 미비하면 힘들여 지은 좋은 글은 원고(原稿)로 남아 그 주위의 몇몇 사람이 돌려 보다가 잃어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후대에 누가 그 내용에 반해 출판할 수도 있다. 조선 후기에 오면 당색이나 과거에의 불만으로 초야에 은거하여 제자 양성과 저작에 힘을 쏟은 학자가 많아지면서, 예술이나 학문으로 혹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낸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 중에 많은 저서가 있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6)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

    (16)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

    일본 동경의 '간다(神田)'거리는 고서점 거리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도 크고 전문성이 있는 곳이다. 중국의 '유리창(琉璃廠)' 거리가 너무 옛 것에 치우쳐있다고 한다면, 간다는 동서고금을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이 거리의 책이 신진대사를 거쳐 지금의 일본문화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동경에만 가게 되면 이 거리는 꼭 들려오게 되고 그래야만 동경을 다녀온 느낌이 든다. 5, 6년전쯤 무슨 일인지 기억은 없지만 동경에 갔다가 잠깐 간다의 서점 거리에 갔다가 자주 가는 반도서점(飯島書店)에 들렸다. 이 서점은 간다의 중심거리라 할 수 있는 큰길가 중간쯤의 2층에 자리하고 있다. 간다의 서점들은 각기 특색이 있는데 이 서점은 옛 글씨나 법첩(法帖), 또

    (15) 추사 편지

    (15) 추사 편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는 전반적으로 말년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는 추사의 명성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빛이 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제주유배(濟州流配) 시절부터 별세할 때까지의 작품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는 벼슬살이를 그만둔 후이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귀양살이의 적적함, 말년의 쓸쓸함 등이 많은 작품을 하게 했던 것 같다. 과천(果川)시절의 작품에 유독 관지(款識)를 많이 했고, 그 외에는 쓴 해의 기록이 없어 정확한 작품연대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또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판각한 다수의 탁본서첩 글씨가 있는데, 이는 일반 사람들이 추사를 알고, 추사체(秋史體)를 익히는 매우 중요한 학습용 글씨 첩이었다. 다시 말해 추사 이후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4) 서수필(鼠鬚筆)

    (14) 서수필(鼠鬚筆)

    1970년대 후반쯤으로 여겨진다. 일 년 내내 문 한번 닫은 적이 없는 인사동 서울서점에 어느 날 문이 닫혔다. 이상히 여겨 며칠 후 물어 보니 이런 사정이 있었다. 문을 닫기 며칠 전 알고 지내던 일본 화가가 방문했다. 화가가 서점구경을 쭉 하고나서 주인 책상 옆에 있는 붓 한 자루를 유심히 쳐다본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수선을 떨더니, 내가 내일이나 모레 꼭 올 테니 그 때까지 이 붓을 팔지 말고 가지고 있어 달란다. 주인은 붓 끗이 다 달아 쓸모도 없어 보이고, 또 얼마 전 사촌 형이 찾아와 할아버지께서 쓰셨던 붓이라며 용돈이나 조금 달라며 놓고 간 두세 종의 붓 중의 하나라 그리 소중히 생각도 아니 하고, 할아버님이 쓰셨던 것이라 하기 때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3) 수집가 김동욱박사

    (13) 수집가 김동욱박사

    인사동 골목하면 지금 모습으로 생각하겠지만 몇 년 전만해도 고즈넉하고 골동거리답게 느껴지는 냄새가 있었다. 그 때는 골동점과 화랑과 고서점, 필방이나 종이가게가 적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름의 형평성 있는 거리의 분위기가 한번 쯤 지나가고 싶게 하였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때는 통문관(通文館)을 중심으로 영창서점, 경문서림, 계림서점(나중에 승문각으로 개명), 문고당, 학예서점, 한국서적센터, 고문당, 호고당, 관훈고서방 등의 고서점이 그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활기를 띠었다. 나는 1970년 후반의 인사동 거리를 생각하면 먼 조선시대라는 터널을 지나가는 환상을 항상 갖는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옛 책과 고문서, 그 곳에 드나들던 대학자, 교수,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2) 만해수연첩

    (12) 만해수연첩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선생하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다. 모든 좋아하는 요소를 다 갖고 있었으며, 일반 사람이면 그의 시를 절대적으로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그의 인품, 특히 불굴의 정신을 말하고 싶다. 근대 인물 중의 한 명을 꼽으라면 꼽힐 분이다. 이런 분의 글씨 한 점 갖고 싶은 욕심은 나만의 욕심일까? 70년대 후반 통문관에 근무하며 스승으로 모신 분이 만해 선생의 유발제자 해어 김관호(海於 金觀鎬)선생이시다. 한때는 대서업을 하셨지만, 만해 선생 살아계실 때는 만해 선생을 곁에서 모신, 독실한 불교인이자 민족주의자였다. 우연히 해어 선생과 친구 분인 골동가게 동화당(同和堂)을 운영하고 계시던 김동규(金同圭)씨와 얘기 하는 중에 「만해수연첩 萬海壽宴帖」이야기를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11) 명시별재집

    (11) 명시별재집

    십오륙 년 전쯤에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1920-2006)선생님을 모시고 댁에 전해오는 장서(藏書)를 구경하다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1741-1793)와 그의 아들 이광규(李光葵;1765-1817), 손자 오주 이규경 (五洲 李圭景;1788-1856)의 친필 원고본 십여 종 20여 책을 구경하고 수불석권하였다. 이 책들은 거의 작은 중국책을 연상시키는 손 바닥 만한 책으로 손때가 묻어 책을 잡은 느낌이 옛 친구의 손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다수 이덕무의 책이었고, 이광규는 한 종류, 이규경이 두 종류였다. 모두 책을 출판하기 위해 깨끗이 정서한 판하본(板下本) 용으로 정리한 것으로 느껴졌다. 한참 후에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이문학회(以文學會)에 갔더니 이 책을 꺼내와 저에게 보이시면서 책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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