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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커버스토리] 설립 66년 만에 첫 교수출신 수장… 이기수 신임 한국법학원장
안재명 기자
2022-04-04 14:02
“실무가·학자 간 소통 활발해져야 진정한 법률문화 창달”
한국법학원 설립 66년 만에 최초로 법학교수 출신 원장이 탄생했다. 주인공은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등을 지낸 이기수(77·사진) 전 고려대 총장이다. 상법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학자이자 뛰어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법학계와 법조계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온 그는 한국법학원의 구성기관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법무부, 대한변호사협회, 한국법학교수회가 천거한 위원들로 구성된 추천위원회에서 새 원장 후보로 단독 추천됐다. 이어 지난 1월 153명의 대의원 투표를 통해 제16대 원장으로 선출됐다. 1956년 설립돼 대한민국 법률체계의 초석을 다져온 한국법학원을 이끌 새 수장을 지난달 2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국법학원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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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경남 하동군 횡천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기수(77·사진) 한국법학원 원장은 일가 친척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큰 도시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하동을 떠나 진주 배영초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이 원장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로 가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린나이에도 왠지 모르게 큰 도시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극구 만류하셨지만 제 뜻을 굽히지는 못하셨죠. 어머니는 배포가 크신 분이셨습니다. 일가 친적 중 가장 큰 어른이었기에 늘 마을 중대사를 중재하셨고, 제게는 늘 따뜻하고 긍정적이셨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어머니들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동군 농부의 아들

어머니 만류에도 진주로 유학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에는 친척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곳이 바로 '헌책방 골목'이 있는 보수동이었다. 철학 서적을 읽으며 자연스레 철학 교수를 꿈꿨지만, 오히려 철학과를 나온 담임선생님이 법학을 공부해보라고 조언해 마음을 바꾸고 고려대 법대에 진학했다. 수업을 듣고 나면 쉬는 시간 10분 만에 앞시간에 배운 내용을 모두 암기해버리는 좋은 습관 덕분이었을까. 사람 만나 어울리기를 좋아해 대학 도서관 한 번 안 가던 그를 책상에 앉힌 건 대학 3학년 때 만난 지금의 아내다.

"처를 만나고 제 삶이 달라졌습니다. 소위 '놈팡이'에서 '공부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한거죠(웃음). 서울대 음대 재학 중이던 처의 권유로 매일 함께 고려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보니 성적이 수직 상승했고 고대 법대 장학생에도 선발됐습니다. 다행히 '등록금을 납부할 처지'는 됐는지라 장학금을 양보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교 때 헌책방서 철학서적 읽으며 

철학교수 꿈꿔

 

177534_1.jpg1970년 부인과 결혼해 신혼의 달콤함에 빠진 지 닷새는 됐을까. 느닷없이 날아온 징집통지서에 온 가족이 '멘붕'에 빠졌다. 결혼하자마자 3년을 독수공방해야 할 처지에 놓인 아내를 도무지 지켜볼 수가 없었다. 여러 방도를 찾던 중 마침 입학 예정이던 서울대 대학원 본부에서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특수간부 후보생' 선발에 대해 알려왔다. 이 제도를 이용하면 석사취득까지 입대가 연기되고, 학위 취득 후 중위로 임관해 육사생도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특수간부 후보생 6기 시험에 합격했고 무사히 석사를 마친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기에 방향타를 제대로 잡았다고 봅니다. 배움의 길만을 걸어왔던 저 자신에게 강단에 설 수 있는 교수로서의 첫 행보를 열어 준 것이니까요. 무엇하나 의심되면 끝까지 자료를 추적해 바로 알고서 가르쳐야 한다는 결심도 육사교관생활에서 키워온 덕목입니다. 지난 50여년의 학문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과 성취도 3년간의 군복무가 초석이 됐다고 믿습니다. 화랑대는 감히 '내 영혼의 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과 나온 담임선생 권유로 

대학은 법학과 진학

 

전역 후 그는 고려대 법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4년 모교인 고려대 법대 부교수로 임용됐다. 정교수가 된 후에는 매 3년마다 한 학기, 매 6년마다 1년간의 연구년을 활용해 독일에 교환교수로 다녀올 만큼 연구에 매진했다. 그리고 2008년 총장 도전 '4수' 만에 제17대 고려대 총장에 선출됐다.

"정년퇴임까지 3년 1개월간 열과 성을 다해 총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가장 신경썼던 부분 중 하나가 교양교육과 사회봉사 활동이었습니다. 교양대학을 설치하자는 구상은 재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교양교육원을 신설해 문화, 봉사, 언어교육 등을 교과내용으로 편성했고, 개방적 세계인을 육성하고자 제2외국어 교육도 확대했습니다. 펀드레이징(fundrasing, 모금)에도 재주가 있어 기금 2000억원을 모아 단독 건물이 없던 2개의 단과대학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陸士교수부 특수간부 후보생 합격 계기 

학문의 길로

 

법조계와의 인연도 깊다. 2011년 2월 고려대 총장 임기를 마친 후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 측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2년간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 대법원 사실심 충실화 사법제도개선위원회 위원장도 지냈다. 법조계와의 인연은 대법원에 그치지 않는다. 2009년부터 2년간은 헌법재판소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2017년부터 지금까지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 운영법인의 감사를 맡고 있다. 법무부에서는 상법개정 심의위원과 남북법령연구 심의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법령 개정 작업에 동참했고, 2013년부터 4년간은 비리나 범죄를 저지른 검사 또는 고위검찰공무원을 처벌하는 서울고등검찰청 검찰시민위원회 위원장직을 수행했다. 그는 2001년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제 회원수 3만3151명을 거느린 대한민국 최대 법률가단체인 한국법학원의 수장이 돼 '한국법학원의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2011년 高大총장 임기 마친 후

 법조계와 인연 넓혀

 

"설립 66년 만에 법학교수 출신인 제가 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한국법학원을 혁신시키고자 하는 회원들의 바람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법학원이 처음 설립됐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법원, 검찰, 법무부 등은 물론 대한변협, 법학교수회 등 각 단체들이 독자적으로 충분히 활동할 수 있고 또 자신들의 의지를 펼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점점 '한국법학원이 무슨 소용이냐'하는 인식도 생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각 개별 단체들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한계도 존재합니다. 한국법학원은 앞으로 모든 구성기관의 의견을 통합·조정하는 단체로 발돋움할 것입니다."

이 원장은 이를 위한 초석으로 충분한 재정 확충을 강조했다.


대법원 양형위원장 등 

거쳐 법령개정작업에도 동참 

 

"한국법학원 육성법에 보면 국가는 한국법학원 운영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보조금을 교부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법학원 예산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각 부처를 예방해 예산 지원을 건의하고 기업을 특별회원으로 확충해 기업 후원을 받는 방안도 구상 중입니다. 충분한 예산이 확보된다면 세미나와 토론회 등을 개최해 국민 속에 가까이 파고드는 법학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격년마다 개최되는 '한국법률가대회'와 2026년 설립 70주년을 맞아 개최될 '세계법률가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50여년 학자로 지내온 그답게 '연구하는 법률가'의 자세도 강조했다.


앞으로 모든 구성원의 

의견 통합·조정하는 단체로  


"사실 모든 실무 법조인들이 처음에는 교수들의 제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 출신인 제가 원장에 선임된 것은 교수로서 제자들을 애프터 서비스(A/S)하라는 사명을 준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저는 법조인들이 학회 활동을 꾸준히 하고 평생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 각 분야에서 전문법관, 전문검사, 전문변호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각계 분야의 실무가와 학자간의 활발한 소통이 이뤄지면 진정한 법률문화 창달도 이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법학원의 목적 따라 필요할 땐 

‘사회 경고등’ 역할도

 

법조계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자유·정의·진리를 가르쳐온 교수로서 근자의 법조계 모습을 보면 과연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가르친 것이 맞나 싶은 의심이 든 적도 있습니다. 법률가들은 권력에 굴종해서는 안 되고, 헌법정신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데, 자기 입맛에 맞게 제도를 바꾸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법학원의 목적이 법치주의 발전과 국민생활에 이바지함에 있는 만큼 필요할 때는 성명서를 내는 등 '경고등' 역할을 할 것입니다. 각 개별 단체에서 내는 성명도 모두 합당하지만, 한국법학원은 유일한 통합단체인 만큼 각 법조기관으로 이뤄진 부원장 회의를 거친 성명은 가장 큰 권위를 가질 것이고 또 그렇게 법학원의 존재의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법률가는 권력에 굴종하면 안 돼 

헌법 정신 지켜야


마지막으로 이 원장은 모든 법률가들이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람의 도리는 이웃을 되돌아보는 자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률가들이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법학의 배움을 실천하고 각자 위치에서 본분을 다하면서 서로를 존중한다면 우리사회가 함께 전진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 또한 한국법학원장이 된 것을 제가 이뤄야 할 평생의 업적이라 여기고 법학원 융성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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