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자 하니 이인복(66·사법연수원 11기) 전 대법관은 법조계에서 신망이 매우 높은 분이라고 했다. 그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리서치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그가 춘천지방법원장으로 있던 때 법원의 구성원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존경하는 판사로 뽑혔다는 것이다. 대법관직을 마칠 즈음에는 그를 도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그와 보낸 시간을 ‘천운’이라고까지 표현했다는 걸 봤다. 당연히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이런 비현실적인 흠모가 가능하냔 말이다.
[ 약 력 ]
1978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4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해 서울고법 판사, 서울지법 판사, 창원지법 진주지원 부장판사, 창원지법 진주지원장,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법 부장판사, 대전고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춘천지법원장 등을 지냈다. 2010년 9월부터 6년간 대법관을 역임했다. 2013년 3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제18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도 맡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20대 국회의원선거 등을 관리했다. 대법관 퇴임 후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활동했고, 법원행정처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을 조사했던 법원 진상조사위원회의 위원장도 맡았다. 법무법인 한누리 고문변호사를 거쳐 2020년 4월 법무법인 화우에 합류했다. 현재 화우공익재단 이사장으로 프로보노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인터뷰를 하기로 한 법무법인 화우 회의실에 들어서니, 유독 따뜻한 표정으로 반가이 맞아주는 노타이 차림의 소탈한 인상을 가진 노신사가 있었다. 그이가 이인복 전 대법관이었는데(인터뷰어를 기다리는 전직 대법관이라니), 이른 고백이지만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를 삼성동 아셈타워(화우가 입주한 빌딩)에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이미지의 연쇄 작용에는 필시 그의 출신지가 충남의 시골(논산)이라는 사전 정보가 개입했을 것이다.
“부모님 모두 초등학교만 졸업하신 분이었는데, 농사짓던 아버지가 면서기 시험에 합격해서 논산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러다가 2학년 때 군청으로 전근을 가시고 또 4학년 때 대전에 있는 충남도청으로 옮기신 거예요. 그때마다 저도 학교를 옮겨서 대전에서 초, 중, 고를 졸업했죠. 부모님은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잘 해라. 이 정도 말씀만 하셨고요. 부모님 학력이 그랬던 걸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많이 배우신 분들이었다면 틀림없이 간섭을 많이 하셨을 테니까요.(웃음)”
이인복 변호사 세대에게 고향이란 아직은 원형의 전설이 꿈틀거리는 공간이다. 그곳에서의 경험과 기억 속에 응집된 서사는 지속적인 삶의 자양분으로 그가 어려운 길을 걸을 때마다 신묘한 저력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변호사는 자신의 유년의 경험과 성장 환경을 저렇듯 무심하게 들려준다. ‘무심’이 그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 순간이다.
사법시험에 패스한 해가 1979년이고 1984년부터 판사로 일했으니 그는 물경 40년 가까이 한국 법원을 경험한 셈이다. 그 긴 세월 동안 한국 법원이 어떻게 진화하고 성장했는지, 월드클래스에 견줄 때는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더니 다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제국의 위안부’ 명예훼손 사건
2심 유죄 이해 안돼… 무죄 취지 파기해야
“1990년, 프랑스로 판사 연수를 갈 일이 있었어요. 사실 우리 사법 체계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어요. 일본을 통해서요. 그런데 우리나라 판사들의 실력이나 수준이 아주 뛰어나다는 걸 프랑스에 가서 느낀 거예요. 직업적인 사명감, 책임감 등에서 훨씬 뛰어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 이렇게 프랑스나 미국 같은 델 연수 가서 그 나라의 법을 배우는 현실에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하더라구요. 우리 법원의 수준은 오히려 가르칠 만한 단계에 와 있어요. 법원과 구성원들의 자질은 뛰어난데, 문제가 있다면 너무 짧은 시기에 한국 사회가 고도성장을 해서 시민의식이 선진국의 그것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점이에요. 간혹 법원이 정치적 중립 측면에서 휘둘린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다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대법관을 퇴임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여 인간미가 흐르는 따뜻한 법원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기가 재판 받는 당사자들과 국민들에게 전해져 따뜻하고 정감 있는 사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법관 생활을 마무리하면서까지 굳이 강조한 “인간미가 흐르는 따뜻한 법원”이라는 게 구체적으로는 어떤 법원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저는 법원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이 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건 법원이 신분제처럼 판사와 일반직으로 나뉘는 거예요. 한국 법원은 이게 너무 심해요. 일반인이나 기자들 입장에서도 법원 하면 판사만 생각해요. 직원들을 그냥 보조하는 기계처럼 보는 거예요. 이건 정말 잘못된 거예요. 판사와 직원들이 일체가 되는 법원이 저는 우리 법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대법관을 마칠 때까지 그걸 나름대로 실천했는데요. 법원과 판사는 직원을 존중해야 해요. 그런 차원에서 법원 직원으로 오래 근무하신 분들을 일선 시군 판사로 임명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가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있는 법원임에도 최근의 대법원장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루되어 구설수에 올랐고 여전히 대법원은 정치적으로 필터링된 국민감정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한 그의 소회가 궁금했다.
정치적 갈등을 법원에 맡기는 경향 심해
이용하려는 세력 의도에 단호히 맞서야
이인복 변호사는 최근 이슈가 된 신당역 스토커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소신 발언을 했다.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좀 안타깝다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이상 사고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만약 결과가 살인이 아니었다면, 스토킹 행위를 한 사람에게 최근의 여론 추이대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면 그 사람은 삶에서 심대한 피해를 입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도 법원의 판결을 결과론으로만 평가해선 안 된다고 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동기는 다양한데 그 결과를 판사가 완전무결하게 내다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내가 듣기에 그의 논리에 결함은 없었다.
정치인들, 정의의 개념 사용 너무 자의적
지금은 보복이나 응징의 의미로 왜곡돼
사람의 말과 태도는 욕망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최선을 다해 숨겨도 지우지 않는 한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게 욕망 아닌가. 그런데 이인복 전 대법관의 말과 태도에서 나는 방하착(放下着)이랄 수 있는 무심과 무위의 위엄을 보았다고 느꼈다. 욕망을 지운 후 자신에게 당도한 결과 앞에서 떳떳한 사람을 본 것이다. 그 부드럽고 낮으면서도 단단한 위엄이, 그래서 주변의 꼿꼿한 것들마저 편하게 주저앉히는 힘이 그에게 있었는데 그것은 정직함과 소탈함, 겸손함의 지극한 호위를 받는 것이었다.
이 변호사는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에게 어떤 훈화를 주었느냐는 질문에, 아무 말도 한 게 없다고 했다. 그냥 잘 할 거라고 믿어주는 게 가장 큰 응원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Let it Be’가 얼마나 강렬하고 매력적인 실천 강령일 수 있는지를 그에게서 보았다.
김도언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