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가족과 고급 저택에 사는 부자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빈부격차로 인한 현대 사회의 양극화를 다룬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상을 휩쓸어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무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라고 믿고 있는 가난한 가족의 아버지가, 부자 가족의 집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위해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는 아들을 향해 ‘사기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 기특하다는 듯 읊었던 명대사인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말은, 블랙코미디 느낌을 탁월하게 살린 주연배우의 명연기에 힘입어 한동안 유행어로서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수사의 큰 그림을 시작 가능하게 하는 수사단서 중에는 소위 검은 돈을 제공한 관련자의 제보가 있다. 제보자를 신뢰하여 범죄혐의에 관한 수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객관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므로 통상 제보자는 나름대로의 증거를 같이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와 저장매체 사용이 일상화된 지금은 각종 증거를 수집하기가 수월해진 덕분인지 현대의 제보는 종종 깜짝 증거를 동반하기도 하는데 사건 당사자들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긴 녹음파일도 그 단골손님 중 하나이다.
영장전담재판을 담당하면서 과거 수사를 담당하지 않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제보 또는 첩보가 수사단서가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죄첩보 수집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수사기관이 예언자도 아니고 모든 범죄현장을 뛰어다니며 누빌 수도 없는 이상, 누구와 누구 사이에 검은 돈이 오고갔는지, 언제, 어디에서 검은 돈이 전달되었는지 스스로 알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사기관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과는 달리 계획이 다 있지 않다.
형사소송법 및 형사소송규칙은 녹음파일 등 정보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으로 문서가 아닌 증거에 관하여는 그 증거능력 인정 여부에 관한 직접적인 규정을 두지 않고 증거조사의 방식에 관한 규정만을 두고 있다. 그 규정에 따르면 녹음파일은 재생하여 청취하는 방법으로 증거조사를 한다고 되어 있을 뿐이지만, 녹음파일에 녹음되어 있는 진술내용이 증명대상인 사실인 경우 이에는 전문법칙이 적용된다고 해석되고 있다.
녹음파일의 음성이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위와 같이 경우에 따라 전문법칙의 적용을 받아 복잡하고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녹음파일은 기록과 재생에 관한 기계적·과학적 정확성이 인간의 지각과 기억능력을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편집 조작의 가능성 등이 배제된다면 그 증거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볼 수도 있다. 예컨대 검은 돈을 받았다는 피의자가 마침 녹음파일에 나온 시간에 하필이면 그 파일에 등장한 식당에서 밥값을 계산한 카드내역이 있다거나, 대화 내용에 사회 지도층으로 통용되는 특정 직업을 상징하는 소품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면 어떠한가. 이를 부인하는 피의자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신용카드를 빌려주었을 뿐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선망받는 직업을 그만두고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야만 한다. 역시 계획이 다 있지 않은 피의자 입장에서는 너무 솔직한 녹음파일이 참으로 유감이겠다.
한편 녹음파일이 증거로서 단골손님이 된 배경에는 휴대폰의 자동녹음 기능이 큰 몫을 하였다. 특별히 어떤 현장을 의도적으로 녹음하였다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휴대폰 소유자의 경우에도 위 자동녹음 기능은 스스로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나머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기습 녹음된 파일이 압수된 휴대폰에서 증거로 출현하는 기이한 현상도 발생하고 있으니, 자고로 검은 돈은 멀리하고 볼 일인가 보다. 이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때론 지켜지기 어려운 해묵은 과제일지도 모른다.
“돈 주는 사람은 뭐 그냥 주냐. ㅂㅅ 도 아니고.” 영화 ‘기생충’이 아닌 다큐멘터리 ‘제보자의 X파일’에 등장하는 소위 검은 돈 공여자의 명대사이다. 돈 주는 사람은 계획이 다 있다.
김정민 부장판사(서울남부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