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위안부문제의 해법을 모색한 책 《제국의 위안부》가 <나눔의집>으로부터 명예훼손 고발을 당한 이후, 박유하 교수는 목하 10년째 묵직한 족쇄에 매인 삶을 살고 있다. (대법원 상고심은 6년째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다.) 피소 사태 이후 그는 국민적 화제 속에서 뜨거운 논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놓고 지식인 사회는 반반으로 나뉘었다. 일본에서도 지지와 비난이 교차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이 같은 주목은 박 교수가 전혀 바라지 않았던 일이다. 학자적 양심과 표현의 자유가 정치화되어 감정적 논쟁으로만 소비되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정년을 맞은 박 교수지만 외양과 말투에선 ‘사양斜陽’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10대 성장기에는 불문학에 푹 빠져 지냈다고 했다. 일면 문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는 어떻게 한 사회를 집어삼킬 만한 논쟁을 촉발한 글을 쓰게 됐을까. 피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위안부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민감한 정치적 화소話素인지 그가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연구자이고 학자로서 자연스럽게, 평소 관심이 있던 주제를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이 발단이었어요. 2000년 일본을 매개로 한국의 민족주의를 반성적으로 돌아본 책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를 펴냈고, 2005년에는 절반 가량을 일본 비판에 할애한 《화해를 위해서》를 펴냈는데 이후 지식 공론장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제국의 위안부》를 쓰게 되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나는 박유하이기 이전에 한국인이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민족주의의 구조적 강박에 대한 이야길 하고 싶었어요.”
박 교수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 국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일본의 사립명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에 진학한다. 이게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는데,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지극히 드문 케이스다. 그래서 박 교수의 성장 배경과 환경 등이 궁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수와 순천 분이었어요. 아마 여순사건 직후에 서울에 올라오셨을 거예요. 위에 언니 두 분은 순천에서 태어났고 오빠와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죠. 어머니는 은행원이셨고, 아버지는 내의를 만드는 사업을 하셨는데 한때는 신세계 백화점에 납품까지 하셨대요. 두 분 모두 교육열도 높으셨고요. 저학년 때까지는 형편이 괜찮았는데 아버지 사업이 잘 안 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어요. 큰언니가 공부를 잘해서 대학원까지 마친 후 외교관과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게 중요한 계기가 되어 부모님도 생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셨고 그 와중에 저는 한국에 남아서 고등학교를 마쳤어요. 부모님과 언니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그게 동기 부여가 되어서 고민 끝에 일본에 있는 대학을 택한 것인데, 학원에 다니면서 한 달 속성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에 가서 1년 정도 더 어학을 익힌 후 대학에 진학했어요.”
사실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공부를 잘했던 학창 시절, 일본은 박 교수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단다. 중학교 때, 오사카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관련 뉴스와 잡지 등을 통해 어렴풋하게 접했을 뿐이라고. 그런 그가 우연과 필연이 포개지면서 일본의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는데, 그때 선택한 학교가 게이오대학이다. 이에 얽힌 사연을 들어보았다.
“사학 명문들인 게이오, 와세대, 아오야마가쿠인 세 군데 시험을 봤는데, 다른 학생들이 와세다를 많이 가기에 저는 게이오에 갔어요. 들어가서 알았는데, 게이오대학은 비교적 집안 형편이 여유로운 학생들이 들어가는 대학이더라구요, 상당히 열려 있었고 차별이나 편견이 없었어요. 또 게이오는 다른 대학과 달리 입학시험에 세계사 과목이 있었어요, 그것도 마음에 들었죠. 게이오대학 다닐 때 자유롭게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 있었어요. 불문학사, 러시아문학사, 음악 같은 것들이었죠. 제가 유학생이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학내 커뮤니티에 참여를 하기도 했어요. 그들의 별장에도 놀러가기도 했지만 일본 학생들의 주류 세계에 편입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어요. 늘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녔지요.”
확인해 보니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설립자는 그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이고 학교 표어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Calamvs Gladio Fortior’다. 나는 이것이 훗날 박유하 교수가 걷게 될 간단치 않은 지식인으로서의 길이 어떤 식으로든 암시된 게 아닌가 하는 비상한 느낌을 받았다. 인문적 통찰과 경세적 감각으로 일본 근대를 설계한 인물이 설립한 대학을 다니는 동안 박 교수의 내면에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근대적 가치나 민족주의의에 대한 특유의 첨예한 감수성의 맹아가 싹튼 건 아니었을까. 그후, 그는 펜을 무기 삼아 제국주의와 가부장제라는 폭력의 칼날에 맞서지 않았나.
게이오 대학 시절을 민들레홀씨와 같은 방외인처럼 지낸 박 교수는 일시 귀국해 결혼을 하고는 와세다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일본 근대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러곤 일본 근대문학의 대부격인 나쓰메 소세키를 주제로 박사 논문 <일본 근대문학과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쓴다.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그의 지적 레이더망에 걸려든 것. 그러면 박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의 어떤 지점에서 민족주의 비판의 모티프를 보았던 것일까. 사전에 질문이 전혀 공유되지 않았는데도 막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원에 들어갈 즈음 일본에서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어요. 나쓰메 소세키가 만주와 조선을 여행하고 쓴 여행기가 있는데, 제가 읽어보니 민족주의적 우월의식과 계급의식 같은 게 있었어요. 예컨대 중국인을 비웃는 대목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걸 문학적 해학이나 유머라고 해석하고 있더라구요. 외국인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죠. 또 《마음》이란 소설도 남자의 관점이 지배적인 작품이었고요. 여성 차별적 시선이 있었던 거죠.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엔 민족주의 비판이 조금씩 대두되고 있었는데, 저는 문학 연구자였기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일본 민족주의의 정체성을 보게 되었던 거예요. 소세키가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시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민족주의 비판은 제국주의 비판과 유리돼 있었어요. 사실 그 둘은 다른 것 같지만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동시대를 사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내가 박 교수의 저작들을 나름대로 잘 따라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위안부》만 해도 그렇다. 여기서 ‘제국’은 남성 중심의 젠더의식에 대한 비판적 함의가 깔린, 거대한 메타포처럼 내겐 읽혔다. 다시 말해, 박 교수가 일련의 저술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건, 남자로 표상되는 국가주의, 나아가 제국주의의 가부장적 지배와 폭력이고, 사실 이것은 일제시대뿐 아니라 인류 역사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지속돼 오고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는 학자들 주장처럼 “강제적”인 것도 있고 “자발적”인 것도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특히 자발적이라는 주장은 박 교수가 직접 한 것이 아니고 인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민족적 자존이라는 당위에 갇혀 일본에 뿌리 깊은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런 프레임에서 자신의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소신 발언을 한 한 학자의 양심을 반민족인 것으로 타기한 것은 아닐는지.
박 교수에게 《제국의 위안부》가 나눔의집에 의해 고발되었던 날의 기억을 물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고발을 당한 날짜가 2014년 6월 16일인데, 15일 일요일 아침에 지인이 인터넷 뉴스를 보고 알려주셨어요.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목이 막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책을 낼 때마다 긴장을 하긴 했지만 고발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모종의 징후 같은 건 있었어요. 《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몇몇 호의적인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또 어떤 일간지에서는 인터뷰까지 했는데도 기사가 나오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조금 이상한 느낌은 있었어요.”
‘제국의 위안부 사태’ 이후 박유하 교수를 지지해온 측에서는 그가 고발을 당한 것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특정 지원단체가 움켜쥐고 있던 정치사회적 기득권과 이익을 박 교수가 침해하려 들자 맛보기로 응징한 것이라는 해석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책이 나오고 가만히 있었으면 고소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책이 나온 이후 제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 뵈러 갔고, 그리고 할머니들과 친해지게 됐어요. 그리고 할머니들을 접촉하면서 만든 어떤 영상을 심포지엄에서 틀기도 했어요. 그게 제가 고소를 당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제가 할머니들을 만났던 이유는 정말로 할머니들이 무얼 원하시는지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 할머니들이 진짜 원하시는 게 뭔지 정말 궁금했거든요.”
나눔의 집 측은 도대체 뭐가 두려워서 자기들 말고 다른 사람이 할머니들을 접촉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던 걸까. 고소를 하면서 그들이 가처분 신청을 한 내역 중에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박 교수의 접근 금지도 있는 걸 보면, 자신이 할머니들을 만났기 때문에 고발을 당했다는 박 교수의 추정은 충분히 합리적인 듯싶다.
언론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당시 기소가 있기 전 검찰 주관하에 조정위원회가 있었다고 했다. 조정위원회가 박 교수에게 제안한 조건은 이미 법원의 가처분 명령에 의해 펴낸 《제국의 위안부》 삭제판(원고측 신청을 법원이 일부 받아들여 초판본에서 34곳을 삭제하고 출판한 판본)을 아예 절판할 것과 당시 일본에서 출간 준비 중이었던 책을 초판본이 아닌 삭제판으로 내라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학자의 양심상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2015년 2월, 삭제를 인용하는 첫 가처분 판결이 나왔을 때 저는 그 결과를 믿을 수 없었어요. 그때부터 재판에 대해서 낙관을 거둬들이게 되었어요. 법원이 이성적으로 판단해 주리라는 믿음이 사라졌다고 할까요. 가처분 판결 때 결과를 낙관한 변호사가 법정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안 나갔는데, 그게 불찰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결국 이 사건은 2015년 11월 검찰 기소로 이어졌고, 2017년 1월 1심에선 무죄, 10월의 2심에선 유죄가 선고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 교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법원에 상고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판결은 물경 6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사법부 구성원으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는 이인복 전 대법관은, 2022년 9월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유하 교수 사건 같은 경우는 대법원이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고 무죄 취지 파기환송을 함으로써 한국의 사법부가 학문과 표현이 자유를 옹호한다는 걸 보여줬어야 한다고 소신 발언을 한 바 있다.
박 교수는 지금 대법원의 판결 지연에 따른 대표적 인권 피해자라는 게 법조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는 의견인데, 당사자로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혼자만 정지된 시간 속에 남겨진 느낌이에요. 해방감이 전혀 없어요. 거취를 정할 때도 늘 구속을 당하는 느낌이에요. 개인적으로 대법원 판결이 나오려면 여론이 받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심 판사의 임기가 내년이면 끝나는데 결국 그때까지 안 나올 공산이 클 것 같아요. 저는 이미 대법원이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해요. 어떤 판결이 나오든지 저는 내가 무죄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판결이 나오려면 문재인 정부에서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장이나 담당 판사가 모두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분들이잖아요. 지금 정부에서 판결이 나오면 그게 어떤 판결이든 정치적 판결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제국의 위안부》 사건은 인간의 양심과 소신,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지적, 문화적 성숙도와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이슈임에 틀림없다. 이 땅의 법률가와 법조인들에게 《제국의 위안부》 사건과 그 법적 처리 과정에 대해 할 얘기는 없는지 마저 물었다.
“작년에 쓴 책 《역사와 마주하기》에서도 했던 말인데요. 위안부 문제는 전쟁범죄의 문제라기보다는 제국의 문제로 봐야 해요. 검찰이나 법원에 계신 어떤 분들은 이걸 계속 전쟁범죄의 문제로만 보는 것 같아요. 법이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가 그래서 정말 중요하죠. 그리고 법이 지나치게 정치화될 경우 개인의 삶을 옭아맬 수도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박 교수는 결코 바라지 않을, 다소 감상적인 표현일 수 있는데, 익숙하고 수월한 세상의 질서나 힘에 기대지 않고 따로 떨어져 불온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고아孤兒의 영’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고아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대신 자유로운데, 그 자유로움으로 우리 사회가 말하지 않고 보지 않았던 것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에게 사회적 핍박과 처벌이 가해진다면 (부모의 권위에 물들지 않은) 고아의 드물고 자유로운 시선과 목소리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일순간 ‘꼰대’로 전락하는 일이다.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것, 저의 삶을 제가 준비할 수 없다는 게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실체 없는 안개 사원 같은 대법원의 판결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박유하 교수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자신에게 도래할 삶을 상상하고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미지에의 자유로운 열정으로, 또는 정리와 충전과 모색으로 충만해야 할 시간을 차압 당했다는 것은. 우리는 이 해괴한 가해의 유력한 목격자이며 공범이 될 것인가.
김도언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