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어는 물론 영어도 서툰, 가난한 이주여성이 찾아왔다. 뜻밖의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남자가 나몰라라 하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생활도 어렵거니와 너무 불안하니 하루빨리 확인받고 싶다고 했다. 남자는 특수한 신분의 외국인이었다. 법률적 조력이 절실했다. 수임료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법률구조제도를 활용해서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사건을 맡았다.
당연해 보이는 사건이었는데 법전을 펴 보니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 민법은 태아의 권리에 관하여 독일,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고 있다. 즉, ①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제762조) ② 상속권(제1000조) ③ 유증(제1064조)의 경우에 한하여 태아의 권리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태아가 원고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편, 부는 포태 중에 있는 자에 대하여도 이를 인지할 수 있으나(제858조), 인지청구의 소는 자와 그 직계비속 또는 그 법정대리인이 제기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기에(제863조) 임부는 소송으로 인지청구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뱉은 말이 있으니 포기할 수 없었다.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간에는 서로 부양의무가 있는바(제974조), 비록 아직 법적으로는 자녀도 배우자도 아니지만 사실상의 아기와 파트너로서의 권리가 있다고 우겨볼 여지가 있었다. 가정법원의 양육비산정기준표에는 0~18세의 자녀에 대하여만 기준이 있지만, -1~0세의 태아에 대해서도 단지 기준이 없을 뿐 돈이 들어간다는 것은 경험칙상 명백했다. 산전양육비 혹은 부양료청구소송으로 가닥을 잡았다.
때마침 어떤 법률구조기금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지원하고 싶다기에 이 사건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는 나의 실수였다. 그 기금에서는 과연 재판권이 있는지, 선례도 없는데 승소가 가능한지, 소가가 너무 적은데 낭비가 아닌지 등의 의문을 끊임없이 표하며 이에 대한 소명을 원했다. 소명요구와 답변을 반복하면서 계절이 바뀌었고, 지원불가통보를 받을 무렵 아이가 태어났으며, 어렵사리 다른 기금에서 구조결정을 받았을 때 남자는 해외로 출국해 버렸다. 아기를 품에 안고 우는 그녀 앞에서 나는 무력감과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미약해서 법정으로 가져가지 못했던 그녀의 권리가 언젠가 울려 퍼지는 날이 올까. 멀어져 가는 듯한 법정을 바라보며 새해 소망으로 빌어본다.
박종명 변호사 (법무법인 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