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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평등의 원칙 관련 최근 대법원 판례와 포이즌 필의 도입 가능성
1. 들어가며 최근 대법원은 주주평등의 원칙과 관련해 2건의 중요한 판결(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1다293213 판결, 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2다224986 판결, 이하 위 두 대법원 판결을 포괄해 “대상판결들”이라 함)을 선고했다. 대상판결들은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반하는지 여부에 관해 원심과 달리 판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판결이라 할 수도 있지만,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와 그 판단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포이즌 필(Poison Pill)이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판단한 하급심 또는 대법원 판결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상판결들의 타당성을 떠나 대상판결이 판시한 주주평등의 원칙 예외의 판단기준을 보면, 조심스럽게 ‘포이즌 필(Poison Pill)이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로 인정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2.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에 관한 판례 변경 가. 주주평등의 원칙 주주평등의 원칙이란, 주주는 회사와의 법률관계에서는 그가 가진 주식의 수에 따라 평등한 취급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대법원 2018. 9. 13. 선고 2018다9920, 9937 판결 등). 우리나라 상법은 주주평등의 원칙을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1주 1의결권(상법 제369조 제1항), 이익배당청구권(상법 제464조), 잔여재산분배(상법 제538조) 등에서 이 원칙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정찬형, 상법(상) 제21판(2018), p.711]. 주주평등의 원칙은 강행규정적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원칙을 위반한 약정이나 정관의 규정, 주주총회 또는 이사회의 결의, 대표이사의 업무집행 등은 법률상 무효에 해당한다(대법원 2020. 8. 13. 선고 2018다236241 판결 등). 나.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에 관한 종전 법원 판결 대상판결들이 선고되기 전까지는,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을 구체적으로 판시한 대법원 판결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하급심 판결이기는 하나, 제주지방법원 2008. 6. 12. 선고 2007가합1636 판결은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는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하여 법률이 정한 경우에 한하여 인정(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5. 4. 2. 선고 2014가합578492 판결은 “주주평등의 원칙에 대한 예외는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인정되며 그 이외에 정관의 규정이나 주주총회의 결의로는 인정될 수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05. 11. 29. 선고 2005가단105918,2005가단105925(병합) 판결은 “상법에서 인정하는 예외의 경우 이외에는 (중략)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반하는 때에는 회사의 선의·악의를 불문하고 무효라고 볼 것이다.”라고 각 판시했다. 즉, 종전 법원은 상법 등 법률에서 규정한 경우가 아니면,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대상판결들은 종전 하급심 법원 판결과 달리, “법률이 허용하는 절차와 방식에 따르거나 그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허용할 수 있다.”라고 판시했다. 즉, 대상판결은 법률의 근거가 없더라도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정한 사유가 인정되면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에 관한 판단기준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에 관한 판단기준과 관련해, 대상판결들은 “차등적 취급을 허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차등적 취급의 구체적 내용, 회사가 차등적 취급을 하게 된 경위와 목적, 차등적 취급이 회사 및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했는지 여부와 정도, 일부 주주에 대한 차등적 취급이 상법 등 관계 법령에 근거를 두었는지 아니면 강행법규에 저촉되거나 채권자보다 후순위에 있는 주주의 본질적 지위를 부정하는지 여부, 일부 주주에게 회사의 경영참여 및 감독과 관련해 특별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회사의 기관이 가지는 의사결정 권한을 제한해 종국적으로 주주의 의결권이 침해되는지 여부를 비롯해 차등적 취급에 따라 다른 주주가 입는 불이익의 내용과 정도, 개별 주주가 처분할 수 있는 사항에 관한 차등적 취급으로 불이익을 입게 되는 주주의 동의 여부와 전반적인 동의율, 그 밖에 회사의 상장 여부, 사업목적, 지배구조, 사업현황, 재무상태 등 제반사정을 고려하여 일부 주주에게 우월적 권리나 이익을 부여해 주주를 차등 취급하는 것이 주주와 회사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따져서 정의와 형평의 관념에 비추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라고 판시했다. 3. 대상판결에 따라 포이즌 필을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 가.포이즌 필의 의의와 우리나라의 포이즌 필 제도의 도입 시도 포이즌 필이란 적대적 M&A가 이루어지는 경우 인수자를 제외한 나머지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포이즌 필은 기존주주들로 하여금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신주를 인수하게 함으로 해서 인수자의 지분율을 희석시키고 인수자의 인수비용을 증가시켜 경영권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박정국, 포이즌 필에 관한 소고 -신주인수선택권의 도입을 중심으로 -, 법학논고 제40집(2012. 10.)(이하 “박정국 논문”), p506].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포이즌 필을 도입해 적대적 M&A에 대한 강력한 방어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IMF 당시 외국기업의 적대적 M&A를 겪으며 포이즌 필 도입에 관 본격적으로 논의했다[최완진, 포이즌 필 도입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했다[최완진, 포이즌 필의 도입이 시급하다, KERI Column(2016-07-08)p.1-2]. 포이즌 필의 도입을 위해, 법무부는 2010. 3. 10. 국회에 상법 제3편 회사편 제4장 제4절의2(신주인수선택권)을 신설하는 상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반대하는 강한 반론이 있어 입법에 이르지 못했다[임재연, 회사법I, 개정5판(박영사, 2018), p.202]. 나. 포이즌 필의 필요성 포이즌 필을 찬성하는 견해는 (1) 현재 상법상 외국인의 국내기업에 대한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수단이 존재하지 아니해 방어회사가 불리한 입장이고, (2) 생산적 투자에 사용될 재원이 경영권 방어에 낭비될 수 있으며, (3) 경영자들의 경영권이 안정적으로 확보되면 중장기적으로 주주가치가 상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박정국 논문 p526). 다. 포이즌 필 도입에 관한 최근 법원의 입장 2020. 11. 17.에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에서, 법원행정처는 "(포이즌 필 도입은) 적대적 M&A의 역기능 억제 등 긍정적 측면도 있다.", "적대적 M&A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경영진 해임 등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등 순기능도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입법정책적 결정이 필요하다.”라는 입장을 밝혔다<2020년 11월 20일자 법률신문(대법원, ‘대주주 3%룰’ 상법 개정안에 “신중한 검토 필요”)>. 법원행정처가 “입법정책적 결정이 필요하다”라고 한 점에서, 법원행정처는 포이즌 필의 장점과 적대적 M&A의 순기능 등을 고려한 포이즌 필 도입에 찬성한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라. 포이즌 필이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로 인정될 수 있는지 포이즌 필은 신주인수권을 적대적 M&A 대상회사 주주에게만 인정하고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인수자에게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반되고,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신주를 발행한다는 점에서 자본충실의 원칙에도 위반되므로 현행법 하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견해가 존재한다. 또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전 법원 판결과 같은 입장을 취할 시, 포이즌 필은 법률에 규정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로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법원은 종전 법원 판결과 달리 ‘차등적 취급을 하게 된 경위와 목적, 차등적 취급이 회사 및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했는지 여부와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포이즌 필의 종류도 다양하고, 포이즌 필의 발동 요건을 각 회사 정관마다 달리 정할 수도 있겠지만, (1) 회사가 포이즌 필의 도입에 관해 주주 전체의 의사를 확인하고, (2) 대다수의 주주들이 포이즌 필의 도입에 찬성하며, (3) 포이즌 필 도입이 대주주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재무적 투자자(FI, Financial Investor)의 적대적 M&A로부터 회사와 기존 주주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 등 회사와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4) 대다수의 주주들이 해당 인수행위나 경영권자의 변경을 반대하고, (5) 정관에서 인정하는 주주들의 신주인수선택권이 인정하는 사유가 매우 제한적이고 예외적이며, (6) 주주들이 신주인수선택권을 통해 매수할 수 있는 주식 수가 합리적으로 제한되고 (7) 신주인수선택권 행사에 따른 주주들의 신주 인수가격이 시세보다는 낮되 자본충실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 정도이며, (8) 주주들이 신주인수선택권 행사를 하는 경우보다 포이즌 필을 도입하지 않을 시 경영권 방어에 들어갈 비용이 과도해 회사에 더 큰 손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고, (9) 신주인수선택권 부여를 하려고 할 시 이사회의 의결뿐만 아니라 주주총회 결의를 통해 차등적 취급으로 불이익을 받는 인수자의 동의 여부와 다른 주주들의 동의율을 확인해 인수자를 제외한 다른 주주들의 압도적인 찬성을 얻는 등 주주와 회사의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정이 존재한다면 대상판결에 따라 주주평등의 원칙의 예외로 인정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본다. 배상현 변호사(OCI홀딩스 주식회사)
투자계약
포이즌필
주주평등의원칙
배상현 변호사(OCI홀딩스 주식회사)
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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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일반
표의자의 중과실 있는 착오와 상대방의 악의 등
[사실관계 및 사건의 경과] 평석에 필요한 한도에서 요약하기로 한다. 1. 원고 증권회사(이 사건 소 제기 후에 파산하여 파산관재인이 소송을 수계하였으나,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는 싱가포르 법인인 피고 회사 등과의 사이에 인터넷을 통하여 파생상품거래를 하였다. 원고는 이를 위하여 다른 소프트웨어 제작회사로부터 시스템거래의 소프트웨어를 구입한 다음, 그 회사의 직원으로 하여금 이자율 등 변수를 입력하고 그 입력된 조건에 따라 호가(呼價)가 자동적으로 생성 및 제출되도록 하였다. 2. 2013년 12월 어느 날 파생상품시장 개장 전에 위 직원이 입력할 변수 중 이자율 계산을 위한 설정값을 잘못 입력하였고, 원고는 그로써 생성된 호가를 그대로 제출하였다. 그에 따라서 피고와의 사이에 코스피 200옵션에 대하여 매우 많은 수의 주가지수옵션매수거래가 성립되었고, 그 대금 584억원이 종국적으로 피고에게 지급되었다. 3. 원고는 착오를 이유로 위 매매를 취소하는 의사표시를 하고 그 대금 중 우선 100억원의 반환을 청구하였다. 제1심법원(서울남부지법 2015. 8. 21. 선고 2014가합3413 판결)은 원고의 중과실로 인한 착오라는 것 등을 이유로 하여 그 청구를 기각하였다. 원심법원(서울고등법원 2017. 4. 7. 선고 2015나2055371 판결)도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우선 원고의 이 사건 의사표시가 그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이를 취소할 수 없다고 하고, 나아가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피고가 “피고가 상대방의 착오를 이용하여 부정한 이익을 취득할 수 있도록 설계된 알고리즘 거래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착오로 인한 호가 제출 사실을 아는 피고 직원이 개입하여 원고의 착오를 유발하거나 그의 중과실을 이용하여 이 사건 매매가 체결되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단하여 상고를 기각하였다(이하 ‘대상판결’이라고 한다). [판결 취지] “민법 제109조 제1항은 법률행위 내용의 중요 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같은 항 단서에서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대한 과실’이란 표의자의 직업, 행위의 종류, 목적 등에 비추어 보통 요구되는 주의를 현저히 결여한 것을 의미한다[참조 재판례들 인용]. 한편 위 단서 규정은 표의자의 상대방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상대방이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를 이용한 경우에는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표의자는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대법원 1955. 11. 10. 선고 4288민상321 판결, 대법원 2014. 11. 27. 선고 2013다49794 판결 등 참조). 다만 한국거래소가 설치한 파생상품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파생상품거래와 관련하여 상대방 투자중개업자나 그 위탁자가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파생상품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계약이 체결되는 방식, 당시의 시장상황이나 거래관행, 거래량, 관련 당사자 사이의 구체적인 거래형태와 호가 제출의 선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하고, 단순히 표의자가 제출한 호가가 당시 시장가격에 비추어 이례적이라는 사정만으로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평 석] 1. 착오에 관한 민법의 규정 (1) 어떠한 경우에 의사표시의 착오를 이유로 계약 기타 법률행위(이하에서는 그 중 계약만을 다루기로 한다)의 효력을 다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법의 역사에서 일찍부터 제기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새롭다. 우리 민법이 정면으로 정하는 바는 네 가지다. 첫째, 착오가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있는 경우에만 그 효력이 다투어질 수 있다(제109조 제1항 본문). 여기에는, 세상사가 무릇 그러하듯이, 어떠한 잘못 또는 실수는 이를 범한 이가 그 귀결을 감당해야 한다는 원칙이 배경에 있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서 민법은 예외적으로 효력을 다툴 수 있게 하는 ‘본질적 착오’의 유형을 열거하는 스위스채무법 제24조와 같은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둘째, 그 경우에도 표의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착오를 들어 계약의 효력을 부인할 수 없다(동항 단서). 셋째, 이상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더라도 표의자는 착오를 이유로 계약을 취소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선택권을 가질 뿐이고, 애초부터 무효인 것은 아니다. 즉 계약은 표의자에게 취소권을 부여한다. 넷째, 표의자가 그 취소권을 행사하여 계약을 무효로 돌리더라도, 그 효력은 선의의 제3자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으로 제한된다(동조 제2항). (2) 이러한 입법적 태도는 예를 들어 독일민법에서의 착오에 관한 입법과정(이에 대하여는 양창수, “독일민법전 제정과정에서의 법률행위 규정에 대한 논의 ― 의사흠결에 관한 규정을 중심으로”, 동 민법연구 제5권(1999), 49면 이하 참조)에 비교하여 보더라도, 적어도 어느 시기까지 크게 탓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독일민법의 착오 규정이 우리 민법의 그것과 크게 다른 점은 거기서는 착오자의 중과실을 착오 취소의 소극요건으로 하지 않고 여전히 취소권을 착오자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주지하는 대로 착오 취소자에게 신뢰이익의 배상책임을 부과한다(제122조). 이 책임은 착오자에게는 그의 유책사유를 요구하지 않고 인정되는데, 다만 상대방이 “취소의 원인을 알았거나 또는 과실로 인하여 알지 못한 경우”에는 이를 배제한다(동조 제2항). 그만큼 상대방의 악의 또는 과실은 착오법리의 범위 안에서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태’는 입법적 차원에서 이미 그 한도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참조를 삼을 만한 것이 스위스법의 태도이다. 스위스채무법 제26조 역시 착오 취소자에게 “계약의 효력불발생으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의 배상책임을 긍정한다. 그런데 그 요건에서는 독일민법과 달리 착오자의 과실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착오자를 알았거나 알았어야 하는 경우에는 그 책임을 배제한다.(이상 동조 제1항) 한편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형평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법관은 그 외의 손해의 배상을 인정할 수 있다.”(동조 제2항) 결국 이들 나라에서는 착오 취소자는 물론이고 나아가 상대방의 사정을 다양하게 고려하여 착오법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2. 상대방의 착오 ‘유발’의 문제 (1) 그렇지만 민법 소정의 여러 제도가 흔히 그러하듯 실제의 사건 맥락은 입법자가 예상하지 아니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중요한 하나가 상대방의 ‘행태’를 고려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유발’ 내지 ‘야기’된 경우에도 위에서 본 요건이 갖추어져야만 표의자는 취소할 수 있는가? 그가 표의자를 착오로 빠뜨릴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면, 물론 이는 ‘사기’(민법 제110조)의 문제가 될 것이다(여기서는 ‘계약 내용의 중요부분’이나 표의자의 중과실 등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러한 의도가 없이 그렇게 하였다면 어떠한가? 예를 들어 상대방이 사실이라고 잘못 알면서 표의자에게 사실 아닌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표의자가 이를 믿고 의사표시를 하게 되었다면?(이는 이른바 공통착오 중에서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된 유형에 해당한다). 또 나아가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되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강화’(이에도 여러 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한 경우는 어떠한가? (2) 대법원이 민사사건에서 이와 같이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사안을 다룬 것은 대판 1978.7.11., 78다719(집 26-2, 209)이 처음이라고 생각된다(그 전에 귀속재산매각처분의 효력이 다투어진 행정사건에서 같은 취지로 판단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한 대판 1970.2.24., 69누83(집 18-1, 행 36)이 있다). 이 판결은 귀속해제된 토지임에도 귀속재산인 줄 잘못 알고 피고(대한민국)에게 증여한 사안에서, “이러한 착오는 일종의 동기의 착오라고 할 것이나, 그 동기를 제공한 것이 피고 산하 관계 공무원이었고, 그러한 동기의 제공이 없었더라면 몇 십 년 경작해 온 상당한 가치의 본건 토지를 선뜻 피고에게 증여하지는 않았을 것인즉 그 동기는 본건 증여행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할 것”이라고 판시하면서 원고의 소유권이전등기말소청구를 인용하였다(상고기각). 여기서는 동기착오이면서도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해당한다는 판단틀이 채택되고 있음이 주의를 끈다. 그 후에도 대판 1987. 7. 21., 85다카2339(집 35-2, 284)(이에 대한 평석으로서 양창수, “주채무자의 신용에 관한 보증인의 착오”, 동, 민법연구, 제2권(1991), 1면 이하가 있다. “채권자에 의한 착오의 유발과 보증인의 취소권”이라는 제목의 그 제3장이 종전에 별로 의식되지 아니하던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유형을 새로운 문제관점에서 제시하였다); 대판 1991. 3. 27., 90다카27440(공보 1276); 대판 1992. 2. 25., 91다38419(공보 1141); 대판 1993. 8. 13., 93다5871(공보 2419); 대판 1994. 9. 30., 94다11217(공보 하, 2841); 대판 1995. 11. 21., 95다5516(공보 1996상, 47), 대판 1996. 3. 26., 93다55487(공보 상, 1363); 대판 1997. 8. 26., 97다6063(집 45-3, 112); 대판 1997. 9. 30, 97다26210(공보 3286) 등 1990년대만 하더라도 많은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재판례가 일반적으로 착오 취소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그 이유로, 문제의 착오가 동기착오인 경우에라도 ―동기착오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그 ‘표시’의 여부 등은 논의하지 아니하고― 그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되었다는 사정을 들고서 바로 또는 다른 사정을 함께 그것은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표의자는 계약을 적법하게 취소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표의자의 중과실 유무 등은 아예 논의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지만, 한편 앞의 대판 97다6063사건에서와 같이 “표의자로서는 그와 같은 착오가 없었더라면 그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고, 보통 일반인도 표의자의 처지에 섰더라면 그러한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중요 부분’의 의미에 관한 판례 준칙을 그 중간항(中間項)으로 드는 예도 물론 있기는 하다. (3) 이러한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사안유형에 대한 판례의 태도에 대하여 학설은 대체로 지지한다. 그것은 “착오 취소의 요건은 표의자와 상대방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기 위한 기준인데, 표의자의 동기착오를 유발한 상대방의 보호가치가 부정된다는 점에서 판례의 태도는 충분히 수긍될 수 있다”고 하거나(지원림, 민법강의, 제20판(2023), 77면), 상대방에 의한 그 유발의 경우에 “그 착오의 위험을 생성 또는 실현케 한 상대방에게 부담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김상중, “동기의 착오에 관한 판례법리의 재구성을 위한 시론적 모색”, 사법(私法)질서의 변동과 현대화(김형배 교수 고희 기념)(2004), 15면). 한편 드물기는 하지만, “상대방의 행태를 기초로 취소의 위험을 부담시킬 수 있는 경우에는 민법 제109조가 아니라 민법 제110조에 의해 규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정성헌, “착오에 대한 민법상 규율의 재구성 ― 대법원 2014. 11. 27. 선고 2013다49794판결을 계기로”, 민사법학 제73호(2015), 265면 이하). 3. 상대방이 악의인 경우 ― 착오의 ‘이용’ (1) 일본의 경우를 보면, 이 맥락에서 상대방의 ‘악의’, 즉 표의자가 착오에 빠졌음을 안다는 사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과 관련하여 다루어진다. 무엇보다도 「민법(채권법)개정검토위원회」가 2009년에 발간한 『채권법 개정의 기본방침』(별책 NBL 126호)은 (i) 상대방이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있는 때, (ii) 상대방이 그 착오를 알지 못함에 대하여 중과실 있는 때, (iii) 상대방이 그 착오를 일으킨 때, (iv) 상대방도 표의자와 동일한 착오를 하고 있는 때에는, 표의자에게 중과실이 있더라도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동 방침, 28면 이하. 당시 고려되는 착오의 법률효과는 무효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대체로 2017년 일본민법 개정에 반영되어(시행은 2020년 4월), ‘상대방이 표의자에게 착오 있음을 알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때’(제95조 제3항 제1호) 또는 ‘상대방이 표의자와 동일한 착오에 빠져 있는 때’(동항 제2호)에는 표의자에 중과실 있는 경우라도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였다(앞 (iii)의 착오 유발에는 언급이 없다). 위 개정 후의 일본민법 제95조는 제1항에서, 우선 행위착오 외에도 동기착오 중에서는 ‘표의자가 법률행위의 기초로 한 사정에 관하여 그 인식이 진실에 반하는’ 것(앞의 1.에서 든 스위스채무법 제24조 제1항의 제4호에서 정하는 “표의자에 의하여 신의성실에 비추어 계약의 불가결한 기초라고 여겨진 사정”에 관한 착오, 즉 기초착오(Grundlagenirrtum)를 연상시킨다. 이 점은 독일민법에서 2017년 대개정 후에 동기착오 중에서 “거래상 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물건의 성상(性狀)에 관한 착오”를 내용착오로 보는 제119조 제2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을 고려되는 착오로 정한 다음, 나아가 ‘그 착오가 법률행위의 목적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중요한 것인 때’에만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한다. 그리고 제3항은 개정 전과 마찬가지로 표의자의 중과실의 경우에는 착오 취소가 배제된다고 하면서도, 동항의 위 두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취소할 수 있음을 정하는 것이다. (2) 대판 2014. 11. 27., 2013다49794(공보 2015상, 9)은 대상판결의 취지와 같이 판시하였다(이 판결은 ‘참조’로서 60년쯤 전의 대판 1955.11.10. 4288민상321을 인용한다. 그 제1심도, 항소심도 버젓이 인용하고 있는 이 판결에 접근할 방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재판례의 ‘공개’ 내지 ‘접근가능성’이라는 ―민법 연구자인 나로서는 꽤나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는 양창수, “『법고을』 유감”, 동, 민법산책(2006), 274면 이하 참조 : “그것들이 재판 실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나아가 변호사의 직무에 도움이 안 될 리 없고, 또 법학교수가 법을 연구하는 데 자료가 되지 않을 리 없다”). 위 판결은 대상판결의 사안과 유사하게, 원고 증권회사의 직원이 파생상품(미화달러 선물(先物)스프레드 1만 5000개) 계약의 매수주문을 개장 전에 입력하면서 0.80원이라고 할 것을 그 100배인 80원이라고 찍음으로써 결국 피고 증권회사와의 사이에 그 내용으로 매매계약이 체결된 사안에 대한 것이다. 원심판결은 그 계약의 착오 취소를 인정하고 원고의 매매대금반환청구를 인용하였는데,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그 이유로 우선 자본시장법상의 금융투자상품시장에서 일어나는 증권이나 파생상품의 거래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 제109조가 적용됨을 선언한 데에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아가 착오 취소에 관하여는 대상판결과 같은 법리를 설시한 다음, 구체적으로는 원고 측의 착오에 중대한 과실이 있지만 “피고가 주문자의 착오로 인한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매도자들보다 먼저 매매계약을 체결하여 시가와의 차액을 얻을 목적으로 단시간 내에 여러 차례 매도주문을 냄으로써 이 사건 거래를 성립시켰으므로” 원고의 중대한 과실에도 불구하고 취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대상판결은 표의자의 중과실에도 불구하고 의사표시의 취소를 긍정하는 추상적인 법리를 그대로 반복한다. 굳이 저 60년 전의 대법원판결과 합하지 않더라도 이제 최근 두 개의 대법원판결만으로 그 법리는 이제 우리 민법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법리는 착오 취소의 제한 요소로서의 표의자의 중과실을 ―법률 밖에서(praeter legem), 즉 법규정에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기준을 도입함으로써― 다시 제한하여 착오 취소의 범위를 확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은 이 점을 제시하여 의식하게 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몇 가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위의 두 선례는 단지 상대방의 악의에서 더 나아가 그가 표의자의 착오를 ‘이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단지 의례적인 장식 문구인가, 아니면 실제로 입증되어야 하는 취소 허용의 요건인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피고가 원고의 착오를 이용하여 이 사건 매매거래를 체결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대상판결의 판단이 착오 취소를 부인하는 종국적인 이유인데, 그 ‘이용’ 여부를 단지 의례적인 장식 문구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제3자의 채권침해가 논의되는 사안유형 중 문제의 행위로 채무자의 책임재산이 감소된 경우에 대하여 대판 2007. 9. 6., 2005다25021(공보 1526) ; 대판 2019. 5. 10., 2017다239311(공보 1207) 등이 그 위법성 요건에 관하여 설시하는 대로 제3자가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존재 및 그 채권의 침해사실을 아는 것’ 외에도 ‘채무자와 적극 공모하거나 채권 행사를 방해할 의도로 사회상규에 반하는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는 등’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레벨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나아가 위의 두 판결은 모두 인터넷금융거래에서 증권회사의 ‘피용자’가 입력을 잘못하여 그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정하여진 사안임에도 그 결론을 달리하여, 2014년 판결은 표의자의 착오 취소를 허용하여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고, 대상판결은 이를 부인하였다. 그 차이의 이유를 위 사건의 어떠한 사실관계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이것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나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상론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다만 하나만 지적하자면, 대상판결의 사안에서는 피고도 이 사건 매매거래 전부터 미리 정하여진 일정한 시스템거래 방식으로 기계적 호가를 계속하여 왔다는 것을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양창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
중대한과실
착오
파생삼품
양창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
2023-08-20
금융·보험
기업법무
민사일반
투자계약상 사전동의권 및 위반 시 위약벌 및 조기상환 청구의 유효성
I. 대상판결 1. 사실관계 회사(공동피고)는 투자자(원고)로부터 신주인수계약(이 사건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하는 방법으로 투자를 받으며, 투자자에게 회사가 투자자의 주당인수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유상증자를 하거나 납입 자본금의 증가 또는 감소 등 주요 경영사항이 진행하게 되면 투자자에게 사전동의를 받고 이를 위반할 경우 투자자가 조기상환 및 위약벌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회사의 대표이사(이해관계인, 공동피고)는 회사의 의무를 연대하여 이행하기로 했다. 그 후 회사는 2차례 걸쳐 상환전환우선주를 발행하여 유상증자를 하였는데 투자자에게 이를 사전에 통지하지 않았고 사전동의를 받지 않았다. 투자자는 회사가 사전통지 및 사전동의 의무를 위반하였음을 이유로 회사와 이해관계인을 상대로 약정 위반에 따른 조기상환청구 및 위약벌의 지급을 구하였다. 2. 대법원의 판시 내용 대법원은 회사가 자금조달을 위해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하면서 주주의 지위를 갖게 되는 자에게 회사의 의사결정에 대한 사전 동의를 받기로 약정한 경우 그 약정은 회사가 일부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주주들을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것이지만, ① 주주가 납입하는 주식인수대금이 회사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금이었고 투자유치를 위해 해당 주주에게 회사의 의사결정에 대한 동의권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피하였으며 ② 그와 같은 동의권을 부여하더라도 다른 주주가 실질적·직접적인 손해나 불이익을 입지 않고 오히려 일부 주주에게 회사의 경영활동에 대한 감시의 기회를 제공하여 다른 주주와 회사에 이익이 되는 등으로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이를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동의권 부여 약정에 따른 차등적 취급이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에 약정 위반으로 인한 손해배상 명목의 금원을 지급하는 약정을 함께 체결하였고 그 약정이 사전 동의를 받을 의무 위반으로 주주가 입은 손해를 배상 또는 전보하고 의무의 이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이는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액의 예정을 약정한 것으로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효하고 일부 주주에 대하여 투하자본의 회수를 절대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단정할 것은 아니다고 판단하였다. II. 평석 1. 대법원 판례의 기본입장 대법원은 상법상 기본원칙인 '주주평등의 원칙'. 즉 주주가 회사와의 관계에서 주식 수에 따라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주평등의 원칙을 기본적인 판단 기준으로 하여 회사가 일부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리나 이익을 부여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효로 보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효하다고 판단하였다. 즉, 우리 대법원은 하급심인 서울고등법원과 동일하게 주주평등의 원칙을 적용하여 “피투자회사의 사전동의권 위반 시 투자자가 위약벌 및 조기상환청구를 할 수 있도록 약정한 것”에 대한 유효성을 판단하였는데, “법률이 허용하는 절차와 방식에 따르거나 그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효하다고 판단하여 원칙과 예외를 보다 명확히 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2. 주주 간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에 대한 판단 근거 대법원은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을 판단하는 근거로서, ① 차등적 취급의 구체적 내용, ② 회사가 차등적 취급을 하게 된 경위와 목적, ③ 회사 및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였는지 여부와 정도, ④ 일부 주주에 대한 차등적 취급이 상법 등 관계 법령에 근거를 두었는지 아니면 상법 등의 강행법규와 저촉되거나 채권자보다 후순위에 있는 주주로서의 본질적인 지위를 부정하는지 여부, ⑤ 회사의 경영참여 및 감독과 관련하여 권한을 부여하는 경우 그 권한 부여로 회사의 기관이 가지는 의사결정 권한을 제한하여 종국적으로 주주의 의결권을 침해하는지 여부, ⑥ 차등적 취급에 따라 다른 주주가 입는 불이익의 내용과 정도, ⑦ 개별 주주가 처분할 수 있는 사항에 관한 차등적 취급으로 불이익을 입게 되는 주주의 동의 여부와 전반적인 동의율. ⑧ 회사의 상장 여부, 사업목적, 지배구조, 사업현황, 재무상태 등 제반사정을 고려하여 일부 주주에게 우월적 권리나 이익을 부여하여 주주를 차등 취급하는 것이 주주와 회사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 8가지를 주요 판단 근거로 제시하였다. 3. 본 사건에서의 특별한 사정 판단 근거 대법원은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을 판단하는 근거를 제시한 후 아래와 같은 내용을 근거로 하여 본 사안의 경우 특별한 사정이 있어 무효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① 대주주가 투자자의 경영사항에 대한 사전동의권 등을 부여함에 동의하면서 투자자에게 우월적 권리를 부여하는 차등적 취급을 승인하였고, 다른 주주들도 이의를 제기한 정황이 없으며, 오히려 투자자의 신주인수대금이 회사와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 ② 투자자에게 회사의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경영사항에 대한 감시·감독 등 목적에서 권한을 부여하는 것만으로 다른 소수주주에게 실질적인 손해나 불이익 등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 ③ 투자자의 사전동의권 등 약정의 대상은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사항으로 주주총회의 결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다른 주주의 의결권이 직접적으로 침해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④ 투자자의 사전통지 내지 사전동의권 등은 채권적 권리에 불과하고 제3자가 투자자의 주식을 양수 받아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양수인에게 그와 같은 지위가 승계되지 않는다. ⑤ 투자자의 회사에 대한 조기상환청구권이나 이해관계인에 대한 주식매수청구권과 위약벌 등 손해배상에 관한 청구권은 회사측에서 약정을 위반할 경우 발생되는 권리여서 투하자본 회수를 목적으로 투자원금 반환 등을 약정한 사안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 ⑥ 투자자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과도한 권한행사로 인하여 회사나 주주들에게 손해를 주는 경우,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 원칙에 따라 권한행사를 통제할 수 있다. 4. 대법원 판결의 판단 근거 등에 대한 의견 및 제언 회사와 이해관계인, 그리고 투자자가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할 때 거의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회사 및 이해관계인이 유상증자 등 주요 경영사항에 대한 사전통지 및 사전동의 의무를 부담하도록 정하고 있고 거의 동일한 내용과 형태의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하고 있기 때문에 본 대법원 판결은 무엇보다도 실무적으로 매우 중요한 판결이라 할 수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들은 실무적으로 주요 경영사항에 대한 사전통지 및 사전동의 조항이 너무나 일반적인 조항이었기 때문에 이를 무효로 판단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사전통지 및 사전동의 조항과 같이 신주인수계약상 투자자를 보호하는 약정은 일정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맞기 때문에 주주평등의 원칙은 엄격하게 판단하는 경우 무효의 소지가 있다는 해석이 계속하여 있어 왔다. 이에 본 대법원 판례에서 신주인수계약상 투자자를 보호하는 약정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주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인정된다는 취지로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다만, 대법원이 이번 사안과 관련하여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라고 판단한 근거 중 몇 가지는 다른 신주인수 사안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서 향후 모든 신주인수 계약상 사전통지 및 사전동의 의무가 당연히 유효하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전동의권 등의 대상은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사항으로서 주주총회 결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다른 주주의 의결권을 직접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근거의 경우, 실무적으로 사전동의권 등의 대상에 주주총회 결의사항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이 사안과 같은 유상증자의 경우에는 자본금이 10억원 미만이면서 등기이사의 수가 3인 미만이어서 이사회가 구성되지 않은 경우 이사회 결의사항이 아니라 주주총회 결의사항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른 주주의 의결권이 직접적으로 침해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대법원은 투자자의 사전통지 내지 사전동의권 등은 채권적 권리에 불과하고 제3자가 투자자의 주식을 양수 받아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양수인에게 그와 같은 지위가 승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들었는데, 신주인수계약의 내용에 투자자의 주식 중 일정 비율 이상을 양도받는 제3자는 해당 신주인수계약상의 지위를 그대로 승계하도록 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역시 일반화시켜서 모든 신주인수계약에 적용시킬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대법원은 투자자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과도한 권한행사로 인하여 회사나 주주들에게 손해를 주는 경우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 원칙에 따라 권한행사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들었는데,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 원칙에 따라 권한행사를 통제하는 것은 사후적인 사법적 판단에 따른 통제에 불구하고 실무상 회사 및 이해관계인 또는 다른 주주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 원칙에 따라 투자자의 권한행사를 사전에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너무 강학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있다. 투자자와 회사 간에 상호 합의에 따라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하였다면 그 내용과 방법이 법률이 허용하는 절차와 방식에 따르지 않았거나 그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없을 정도로 주주평등의 원칙에 반하는 경우가 아닌 한 당사자 간의 의사는 최대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차등 취급이 예외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여서 신주인수계약상 의무 위반에 대한 불이익(위약벌, 조기상환의무, 손해배상의무 등) 역시 투자자의 손해를 배상하고 의무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대로 유효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위약벌 등이 과도할 경우 법원에서 적극적으로 직권으로 감액하여 회사 및 이해관계인이 적절한 수준의 책임만을 부담하도록 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법적, 정책적 방향이 건강한 스타트업 투자생태계를 만들어가는 방향이라 생각한다. 5. 결론 투자업계에서 체결되는 대부분의 신주인수계약의 내용이 이번 사안의 신주인수계약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인해 투자업계에서의 실무상 혼란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대법원 판결은 주주평등 원칙의 예외, 즉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일 뿐이고, 구체적인 사안과 계약의 내용에 따라서 달리 판단될 여지가 있으니 앞으로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할 때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안희철 변호사(법무법인 디라이트)
투자계약
사전동의
위약벌
안희철 변호사(법무법인 디라이트)
2023-08-16
금융·보험
소비자·제조물
티머니카드의 분실신고접수 및 잔액환불 거부에 대한 소비자단체소송
1. 서론 원고 한국소비자연맹(회장 강정화)은, 소비자가 피고 (주)한국스마트카드의 홈페이지에 등록한 티머니카드(선불식 충전카드)를 분실하거나 도난당한 경우에 피고가 분실신고접수 및 잔액의 환불을 거부하는 행위는 '소비자의 재산에 대한 권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고 그 침해가 계속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아 그 행위의 금지 및 중지를 구하는 ‘소비자단체소송’을 제기하였다(소비자기본법 제70조). 소비자단체소송제도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소비자단체 등에게 사업자의 위법한 행위의 금지 및 중지를 청구할 수 있는 소권을 부여한 '소비자기본법' 상의 제도이다(소비자단체소송제도의 의의 및 소송의 현황에 관하여는, 서희석, '소비자단체소송제도의 발전적 확대방안-집단적 소비자피해의 구제를 위한 소송제도의 정비-', 사법 제53호(2020. 9.), 53면 이하를 참조). 이에 대해 최근 대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1심 및 2심 판결도 같음). 이 판결은 소비자단체소송에 관한 대법원으로서의 최초의 판단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으나, 카드를 피고의 중앙서버에 등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분실신고접수 및 잔액환불을 거부당하고 있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실망스런 결과가 되고 말았다. 본고에서는 본건 소비자단체소송이 어떠한 이유로 제기되었고, 대법원은 어떠한 논리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는지를 살펴본 후, 그 문제점 및 향후 과제에 대해 사견을 언급하기로 한다. 2. 사안의 개요 (1) 사실관계 및 피고의 주장 피고는 티머니카드의 이용약관 제7조 제2항(이하 '이 사건 약관조항'이라 한다)에서 '고객의 T-money 분실 또는 도난 시 기 저장된 금액과 카드 값은 지급 받으실 수 없습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자금융거래법(이하 '법'이라 한다) 제10조(접근매체의 분실과 도난 책임) 제1항은, '금융회사 또는 전자금융업자는 이용자로부터 접근매체의 분실이나 도난 등의 통지를 받은 때에는 그때부터 제3자가 그 접근매체를 사용함으로 인하여 이용자에게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 다만, 선불전자지급수단이나 전자화폐의 분실 또는 도난 등으로 발생하는 손해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하고, 대통령령은 "법 제10조제1항 단서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라 함은 선불전자지급수단이나 전자화폐의 분실 또는 도난의 통지를 하기 전에 저장된 금액에 대한 손해에 대하여 그 책임을 이용자의 부담으로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약정이 금융회사 또는 전자금융업자와 이용자 간에 미리 체결된 경우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시행령 제9조). 티머니카드는 선불전자지급수단으로서 접근매체의 일종이다. 피고는, 이 사건 약관조항은 법 제10조 제1항 단서 및 시행령 제9조에 따라 티머니카드의 분실 등의 경우에 사업자가 면책된다는 취지를 합법적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원고의 주장 법 제10조는 접근매체의 분실 등의 통지시점을 기준으로 분실 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무권한거래에 따른 손해에 대한 책임분담의 룰을 정한 것이다. 즉 통지시점 이전에 제3자의 무권한거래로 발생한 이용자의 손해는 이용자가 부담하고 통지를 하면 그 시점부터 금융회사 등이 그 손해를 부담한다. 통지가 이루어지면 금융회사 등은 당해 접근매체의 사용정지 등의 조치를 취하여 무권한거래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무기명 카드의 경우에는 분실 등 통지를 하여도 이용자의 본인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용정지 등의 조치도 불가능하다. 법 제10조 제1항 단서 및 시행령 제9조에 '선불전자지급수단이나 전자화폐'에 대해 면책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카드가 무기명식으로 발행되는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티머니카드도 대부분의 경우 무기명식으로 발행된다. 그러나 어린이·청소년 카드의 경우에는 요금할인을 받기 위해서 피고의 중앙서버에 개인정보 및 카드번호 등의 등록이 필수적이다. 또한 일반카드라 하더라도 중앙서버에 등록을 하면 마일리지 적립 및 소득공제가 가능하다. 등록에 의하여 카드가 특정되고 이용자의 본인확인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등록카드를 분실 등 하였을 경우 사업자는 카드 사용정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등록 티머니카드의 경우 무기명식 카드와는 사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등록 티머니카드의 잔액환불은 물론 분실 등 통지(신고)의 접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원고는 등록 티머니카드의 분실신고의 접수 및 잔액의 환불을 거부하는 피고 행위의 금지 및 중지를 청구하면서, 그 논거로서 (1) 중앙서버에 등록된 카드의 경우 법 제10조 제1항 단서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2) 설사 단서가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분실 등에 따른 신고접수 및 잔액환불을 거부하는 피고의 이 사건 약관조항은 '법률에 따른 고객의 해제권 또는 해지권을 배제하거나 그 행사를 제한하는 조항'으로서 약관규제법 제9조 제1호에 해당하여 무효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판결에 대한 상고이유에도 그대로 설시되었다. 3. 대법원의 판단 및 검토 (1) 등록 티머니카드에 전자금융거래법 제10조 제1항 단서가 적용되는지 여부 대법원은 “법 제10조 제1항 단서는 문언상 기명식과 무기명식을 구분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불전자지급수단은 그 특성에 비추어 기명식이든 무기명식이든 금융회사 등을 면책시키는 약정을 할 필요가 있다는 사정 등에 비추어 보면, 법 제10조 제1항 단서의 ‘선불전자지급수단’에는 기명식과 무기명식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하선은 필자)고 판시하여 원고의 상고이유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이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이것은 (대법원도 그 판결문에서 설시하고 있는) '법과 그 시행령이 선불전자지급수단이나 전자화폐를 기명식과 무기명식으로 구분하여 발행권면 최고한도와 양도방법 등을 달리 정하고 있는 점'(따라서 법은 선불전자지급수단의 규율에 관하여 기명식과 무기명식의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 및 중앙서버에의 등록을 통해 실지명의가 확인되는 선불전자지급수단의 ‘기술적 특성’을 전혀 무시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판단에 의하면 선불전자지급수단 등을 기명식으로 발행했다 하더라도 법 제10조 제1항 단서에 의한 면책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접근매체의 분실 등의 경우에 무권한거래로부터 이용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 본문의 사정범위에서 선불전자지급수단 등은 (기명식, 무기명식을 불문하고) 처음부터 배제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법 제10조 제1항의 입법취지를 완전히 몰각시키는 것이다. 다만 법 제10조 제1항은 면책의 범위를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기 때문에 시행령의 운용 여하에 따라서는 위와 같은 불합리함이 상쇄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2) 이 사건 약관조항의 유효성 여부 시행령은 면책의 범위를 사업자와 이용자 간의 약정에 의하도록 계약자유에 다시 위임하고 있다(제9조). 이 사건 약관조항은 그 결과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 약관조항이 무효가 아니라고 하면서, 나아가 “이 사건 약관조항은 티머니카드 소유자가 카드를 도난당하거나 분실한 경우를 대비하여 그 위험부담에 관하여 정하고 있을 뿐 카드 소유자의 해제권이나 해지권을 제한하고 있지 않는데도 원심이 이 사건 약관조항이 결과적으로 카드 소유자의 해제권이나 해지권을 제한한다고 판단한 부분은 부적절하다”(하선은 필자)고 판시하여 원고의 상고이유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법원의 판단에는 찬성할 수 없다. 이용자에 의한 분실 등의 통지는 법 제10조 제1항에 따른 책임분담의 기준시점을 정한 것이지만, 나아가 더 이상 카드이용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이용계약을 종료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은 카드 이용계약에 대한 해지권을 행사하는 것이고, 법 제10조 제1항은 이를 보장한 조항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약관조항은 등록을 통해 실지명의가 확인되는 등의 기명식 카드라 하더라도 분실 등의 경우에 잔액환불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바, 이것은 기명식 카드의 경우에도 이용자의 해지권의 행사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취지를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법과 시행령에 의해 위임된 계약자유의 한계, 즉 '법 제10조 제1항의 입법취지 내에서의 자유'라는 내재적 한계를 넘는 것이다. 이 사건 약관조항은 등록 티머니카드의 경우에는 법 제10조 제1항 단서에 따른 면책의 범위에서 제외하도록 하였어야 한다. 등록을 통해 실지명의가 확인되는 경우에도 분실 등 통지 및 잔액환불이 불가능하다면 해당 약관조항은 '법률에 따른 고객의 해지권을 배제하거나 그 행사를 제한하는 조항'으로서 무효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약관규제법 제9조). 4. 결론 및 향후 과제 (1) 대법원의 결론은 법 제10조 제1항 소정의 분실 등 책임의 예외를 인정하는 동 단서가 문언상 기명식과 무기명식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동 단서에 따른 면책약관이 유효하다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등록카드의 경우 무기명식 카드와는 달리 중앙서버에의 등록을 통해 본인확인 내지 카드의 특정이 가능하다는 기술적 특성을 갖고 있다. 잔금확인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이용내역(교통수단 및 가맹점 이용내역)을 1초 단위로 발급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중앙서버에 의한 카드이용에 대한 통제도 기본적으로 가능하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카드의 분실 등 통지가 있을 경우 사용정지 조치를 취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게 가능할 것이다(원심은 신용카드와 같이 실시간 통신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점을 청구기각 사유로 들고 있으나, 사용정지 조치를 위하여 반드시 그와 같은 실시간 시스템이 전제될 필요는 없다). 법이 선불전자지급수단을 기명식과 무기명식으로 구분하면서 그 규율내용에 차등을 두고 있는 것(법 제18조 제2항, 제23조 제1항 등)에서 법 제10조 제1항의 규율이 제외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선불전자지급수단의 분실 등 책임에 관하여 규정하는 법 제10조 제1항에 있어서도 기명식과 무기명식 선불전자지급수단의 취급은 달라져야 한다. 동 본문은 실지명의 확인이 가능한 기명식 선불전자지급수단 등을, 동 단서는 무기명식 선불전자지급수단 등을 전제로 하는 규정이라고 해석하여야 분실 등 책임에 관한 그 입법취지를 살릴 수 있다. (2) 대법원은 이 사건 약관조항에 의한 면책의 범위가 계약자유의 내재적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 위 조항을 무효로 판단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건 대법원판결로 인해 법 제10조 제1항은 이제 선불전자지급수단 등에 관한 한 사업자가 자발적으로 면책약관을 삭제하지 않는 한 무의미한 규정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향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입법론에 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입법론으로서 상정 가능한 방법은 법 제10조 제1항 단서에 면책의 범위를 한정하는 수정을 가하는 것이다. (가령 전자금융거래법 제10조 제1항 단서를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다만, 실지명의가 확인되지 아니하는 선불전자지급수단 또는 제16조제1항 단서의 규정에 따른 전자화폐의 분실 또는 도난 등으로 발생하는 손해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랜 논의를 통해 창설된 소비자단체소송제도를 통하여 해석론(=司法積極主義)에 따른 해결이 가능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하고 합리적인 이유의 제시없이 그것이 좌절된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희석 교수(부산대 로스쿨·전 한국소비자법학회장)
티머니카드
소비자단체소송
약관
서희석 교수(부산대 로스쿨·전 한국소비자법학회장)
2022-09-20
금융·보험
민사일반
마이너스 통장에의 착오 송금에서 부당이득반환청구의 상대방
[사실관계 및 소송의 경과] 1. 원고가 2014년 9월에 A가 피고 은행에 그의 명의로 개설한 예금계좌로 3000여만 원을 이체송금하였다. 그 계좌는 통상 ‘마이너스 통장’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잔고가 마이너스인 경우에는 은행이 그 상당액을 자동적으로 대출한 것으로 하되(이른바 ‘종합통장 자동대출’) 계좌에의 입금이 있으면 이로써 그 대출금에 충당하기로 미리 약정되어 있었다. 위 이체 당시 계좌의 잔고는 마이너스 8400여만 원이었다. 2. 그런데 원고는 B에게 금전을 지급할 의사이었고 A에 대하여는 그 지급의 법적 원인 및 의사가 없음에도 착오로 행하여졌다. 사실 A는 동년 3월에 B와 이혼하면서 자신의 사업을 B에게 양도하였고 그때부터 B는 같은 내용의 사업을 운영하면서 한편 그 상호도 바꿨다. 그리하여 원고는 물품대금으로 B에게 지급할 금전을 위와 같이 A의 계좌에 이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고는 다음날 피고에게 위의 이유를 들어 금전의 반환을 구하였으나 피고는 이를 거부하였다. 3. 원고는 이 사건 소송에서 피고에 대하여 위 이체된 금전의 반환을 부당이득을 이유로 청구하였다. 제1심(수원지법 평택지원 2015가단6215 판결)은 그 청구를 기각하였다. 항소심(수원지법 2016나50495 판결)도 원고의 항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상고를 기각하였다. [판결 취지] “종합통장 자동대출에서는 은행이 대출약정에서 정하여진 한도로 채무자의 약정계좌로 신용을 공여한 후 채무자가 잔고를 초과하여 약정계좌에서 금원을 인출하는 경우 잔고를 초과한 금원 부분에 한하여 자동적으로 대출이 실행되고 그 약정계좌에 다시 금원을 입금하는 경우 그만큼 대출채무가 감소하게 된다(대법원 2015. 3. 12. 선고 2013다207972 판결 등 참조). 종합통장 자동대출의 약정계좌가 예금거래기본약관의 적용을 받는 예금계좌인 경우에 그 예금계좌로 송금의뢰인이 자금이체를 한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송금의뢰인과 수취인 사이에 자금이체의 원인인 법률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수취인이 수취은행에 대하여 위 이체금액 상당의 예금채권을 취득한다. 다만 약정계좌의 잔고가 마이너스로 유지되는 상태, 즉 대출채무가 있는 상태에서 약정계좌로 자금이 이체되면, 그 금원에 대해 수취인의 예금채권이 성립됨과 동시에 수취인과 수취은행 사이의 대출약정에 따라 수취은행의 대출채권과 상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 결과 수취인은 대출채무가 감소하는 이익을 얻게 되므로, 설령 송금의뢰인과 수취인 사이에 자금이체의 원인인 법률관계가 없더라도, 송금의뢰인은 수취인에 대하여 이체금액 상당의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가지게 될 뿐이고, 수취인과의 적법한 대출거래약정에 따라 대출채권의 만족을 얻은 수취은행에 대하여는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취득한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법리에 비추어 보면, 원고가 송금한 이 사건 금원은 설령 착오송금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와 관계없이 A 명의의 종합통장 자동대출의 약정계좌인 이 사건 계좌가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입금됨으로써 종합통장자동대출에서 실행된 A의 대출채무가 감소하게 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피고가 부당한 이득을 취득한 것이 없다고 본 원심판결은 정당하다.” 은행은 단지 송금의뢰자가 행하는 금전 지급의 ‘통로’ 내지 ‘수단’일뿐이고 그 상대방이라고 할 수 없고, 그의 법적 지위를 성질결정하자면 민법 제391조에서 정하는 ‘이행보조자(수령보조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지급된 금전의 반환이라는 급부의 원상회복이 문제 되는 법적 장면에서 그는 급부자의 급부 반환청구의 상대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상 판결이 비록 이른바 마이너스 통장에 입금된 금전의 반환청구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원고의 이 사건 이체 송금으로 인한 급부 관계는 피고 은행이 아니라 A와의 사이에서 성립한 것이므로, 그 급부의 원인이 없음을 이유로 하는 반환청구도 그를 상대로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나고, 이체된 금전의 그 후의 운명(채권채무의 성립, 자동적 상계 등)은 애초 이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평석] 1. 필자는 이번 대법원판결(이하 ‘대상판결’)의 결론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하여는 쉽사리 수긍할 수 없다. 2. 은행 계좌에 ‘착오로’(이는 대체로 비채변제에 관한 민법 제742조의 적용 또는 유추에 기하여 반환청구가 배제되는 경우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체송금이 이루어진 사안유형에서 송금의뢰인이 부당이득을 이유로 그 반환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는 상대방이 은행인가, 아니면 그 송금의 ‘수취인’(금융실명제 이후에는 그야말로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계좌명의인, 즉 예금주)인가의 법문제에 대하여는 2007년 이래로 판례의 태도가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다. 은행이 아니라 수취인이라는 것이다. 지도적 선례는 대상판결도 인용하고 있는 대법원 2007. 11. 29. 선고 2007다51239판결(대법원판례집 55권 2집, 360면)이다(그 전에 이미 대법원 2006. 3. 24. 선고 2005다59673판결이 결국 같은 뜻을 판시하고 있었다). 그 후로 대법원 전원합의체 2018. 7. 19. 선고 2017도17494 전원합의체 판결(대법원판례집 66권 형사편, 647면; 공보 하권, 1801면)을 거쳐 최근의 대법원 2019. 9. 26. 선고 2017다51504 판결(법고을)에 이르기까지 법고을에 '따름판례'로 인용된 것만을 찾아보더라도 9개의 대법원판결이 같은 취지를 판시하고 있다. 이러한 대법원의 태도는 예를 들면 독일에서도(이에 대하여는 우선 민법주해[XVII](2005), 206면 이하(양창수 집필) 참조), 일본에서도(무엇보다도 最高裁 1996(平成 8). 4. 26. 판결(民集 50권 5호, 1267면), 그리고 森田宏樹, “振込取引の法的構造 —「誤振込」事例の再検討”, 中田裕康 등 編, 金融取引と民法法理(2000), 123면 이하 등 참조), 판례 및 학설상으로 두루 지지되고 있다. 3. 그런데 이들 대법원의 재판례는 예외 없이 그 판결이유 중에서 “송금의뢰인과 수취인 사이에 계좌이체의 원인인 법률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수취인이 계좌이체금액 상당의 예금채권을 취득한다”는 것, 즉 은행은 그에 상응하는 예금채무를 부담한다는 것을 내세운다. 그리하여 은행은 이익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은행에 대하여는 송금의뢰인이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에서와 같은 이른바 ‘마이너스통장’, 즉 계좌 잔고에 전혀 예금이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당해 계좌에 입금된 것이 있으면 이를 당연히 그 부족액에 충당하게 되는 통장에 있어서는 과연 그 입금으로 애초 수취인이 은행에 대하여 무슨 예금채권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는 게 과연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이러한 의문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상판결은 앞서 인용한 ‘판결 취지’에서 보듯이 먼 길을 돌아서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 마이너스통장에서 잔고가 마이너스가 되면 은행은 자동적으로 대출을 실행한 것이 되어 예금주에 대하여 대출채권을 가지게 된다. 둘째, 그 상태에서 입금이 있으면 송금의뢰인과 수취인 사이에 자금이체의 원인인 법률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수취인은 은행에 대하여 그 금액 상당의 예금채권을 취득한다. 셋째, 이 두 개의 대립하는 채권은 “수취인과 은행 사이의 대출약정에 따라” 상계로 소멸한다. 넷째, 이로써 수취인은 대출채무가 감소하는 이익을 얻는다. 이로써 송금의뢰인은 수취인에 대하여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한편 은행은 수취인과의 적법한 대출거래약정에 따라 대출채권의 만족을 얻은 것이어서 그에 대하여는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취득한다고 할 수 없다. 4. 그러나 은행 계좌에의 착오 송금의 사안유형에서 은행이 아니라 수취인이 송금의뢰인이 취득하는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의 상대방이 된다고 하여야 하는 이유를 애초 예금채권의 발생 여부 또는 그 귀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송금의뢰인은 일정한 목적으로 ―예를 들면 채무의 이행을 위하여 또는 대여나 증여의 목적으로(causa solvendi, credendi, donandi. 이 셋이 전통적으로 어떠한 급부의 원인이다)― 금전을 인도(‘지급’)하였지만 결국 지급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는 것, 그것이 부당이득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정이다(이는 이른바 과다지급의 경우에도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이하에서는 이 유형은 따로 논의하지 않는다). 거기서 은행은 단지 송금의뢰자가 행하는 금전 지급의 ‘통로’ 내지 ‘수단’일 뿐이고 그 상대방이라고 할 수 없고, 그의 법적 지위를 성질결정하자면 민법 제391조에서 정하는 ‘이행보조자(수령보조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지급된 금전의 반환이라는 급부의 원상회복이 문제되는 법적 장면에서 그는 급부자의 급부 반환청구의 상대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은행 계좌에의 이체를 통한 금전 지급이 적법한 것으로 효력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계좌 번호를 일반적으로 또는 특정한 제3자에게 개시(開示)하는 것에 의하여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금전 지급의 당사자 사이에 합의된 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판단 기준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이익형량은 이 사건의 사안과 유사한 이른바 ‘삼각관계에서의 급부부당이득’에 관한 지도적 선례인 대법원 2003. 12. 26. 선고 2001다46730판결(대법원판례집 51권 2집, 375면)(앞에서 든 대법원 2007. 11. 29. 판결과 함께 이들이 다름아닌 '대법원판례집'에 수록된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에서 적절하게 제시된 바 있다(자기 행위로 인한 위험의 자기 부담 및 각자의 계약상 항변사유의 관철 등). 따라서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기로 한다. 5. 앞의 지도적 선례 대법원 2007. 11. 29. 판결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그러한 취지가 주장되었다. 즉 착오 송금의 부당이득법 처리에서는 그 이유를 수취인의 예금채권의 성립 등을 들어 은행에는 이익이 없다는 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송금 의뢰로 인한 급부관계는 송금의뢰인와 수취인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 급부의 원인 결여로 인한 부당이득(이른바 급부부당이득)도 송금의뢰인과 수취인 사이에만 성립한다”는 것이다(양창수, 일반부당이득법의 연구, 1987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24면 이하; 김형석, “지급지시·급부관계·부당이득”, 서울대 법학 47권 3호(2006), 308면 이하. 위 2007년 판결에 대하여 윤진수, “2007년 주요 민법판례 회고”, 서울대 법학 49권 1호(2008), 379면). 이에 따른다면, 대상판결이 비록 이른바 마이너스통장에 입금된 금전의 반환청구에 관한 것이었다고 해도, “원고의 이 사건 이체송금으로 인한 급부관계는 피고 은행이 아니라 A와의 사이에서 성립한 것이므로, 그 급부의 원인이 없음을 이유로 하는 반환청구도 그를 상대로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나고, 이체된 금전의 그 후의 운명(채권채무의 성립, 자동적 상계 등)은 애초 이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양창수 전 대법관(한양대 로스쿨 석좌교수)
마이너스통장
착오송금
부당이득반환청구
양창수 전 대법관(한양대 로스쿨 석좌교수)
2022-08-25
금융·보험
기업법무
소유권취득조건부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질
[사건의 개요] 1. 사실관계 ① 해상운송업을 주로 하는 대한민국 법인인 원고는 2008년 4월 13일 파나마 법인으로 선박보유회사인 피고와 캄보디아에 등록된 선박의 소유권취득조건부 선체용선(bareboat charter with hire purchase, BBCHP)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선료는 1일당 일화 130,000엔이고, 용선기간(50개월) 종료 후 인도대금 38,000,000엔을 피고에게 지급한다. 용선기간 만료 후 피고는 원고에게 소유권을 이전한다. ② 원고는 42회차부터 용선료를 지연하여 분할 납부하였고, 46회차분 이후는 매월 3,000,000엔을 지급하였다. 원고가 2013년 6월 27일까지 지급한 용선료 총액은 217,100,000엔이다. ③ 원고가 용선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아니하고 용선기간 만료일(2012. 6. 12.) 이후 계속 사용하였음에도 피고는 이 사건 선박을 회수하지 않았다. ④ 이 사건 선박은 2013년 7월 12일 항해 중 폭발 사고로 침몰하였다. ⑤ 원고에게 선박의 관리를 위탁받은 B 회사는 A 보험회사와 선체보험계약이 포함된 보험계약을 체결하였다. ⑥ 사고 발생 후 원고와 피고가 각각 자신이 정당한 보험금청구권자라며 보험금의 지급을 구하자, A 보험회사는 채권자 불확지를 이유로 보험금을 변제공탁하였다. 2. 사건의 경과 ① (본소) 원고는 용선료 대부분을 피고에게 지급하여 이 사건 선박의 사실상 소유자의 지위에 있으므로 보험계약의 피보험이익이 원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탁금의 출급청구권자가 원고라는 확인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② (반소) 피고는 용선료 및 선박인도대금을 전액 납입하지 않은 이상 선박의 소유권자는 피고이므로 피보험이익은 피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탁금의 출급권자가 피고라는 확인을 구하고, 미지급 용선료 15,000,000엔의 지급을 구하는 반소를 제기하였다. 3. 대상판결 대법원은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질에 관한 원심의 판결이유를 그대로 원용하였다. 원심은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은 원고가 피고에게 약정 용선료 등(50개월간 1일당 130,000엔의 용선료 + 선박인도금 38,000,000엔)을 모두 지급하면 피고가 원고에게 선박의 소유권을 이전한다는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소유권유보부매매와 유사한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격은 용선기간 종료 후 소유권취득 조건이 부가된 선박임대차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하였다. [연구 및 평석] Ⅰ. 선체용선계약의 의의와 법적 성질 1. 선체용선계약의 의의 선체용선계약은 통상 ① 선박 임대차계약, ② 운용형 선체용선계약, ③ 금융형 선체용선계약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상법상 선체용선계약이 민법상 임대차계약과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운용형 선체용선계약(Operating Bareboat Charters)의 경우, 용선자가 용선기간 중 선박의 점유와 지배·관리권을 행사하므로, 선박소유자는 선박 인도시 용선계약에 따른 감항능력을 구비한 선박을 인도해야 할 주의의무를 부담할 뿐이다. 금융형 선체용선계약(Financing Bareboat Charters)은 용선기간 동안 선박의 소유권은 금융제공자가 보유하지만, 이는 자신의 대여금채권의 담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뿐 선박에 대한 지배·관리권은 용선자에게 이전된다는 의미에서 용선자는 ‘선박의 사실상 소유자(the de facto owner)’라고 볼 수 있다. 해운실무상 선체용선계약은 자금이 부족한 해상기업주체의 선박 획득에 필요한 물적 금융의 수단으로서 BBCHP계약이 주로 이용되고 있다. 2. 소유권취득조건부 선체용선계약의 핵심 요소 선체용선계약의 핵심 요소는 '선박소유자로부터 용선선박의 점유와 지배·관리권이 용선자에게 이전된다'는 점에 있다. 해운실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표준 선체용선계약서식인 BARECON 2017의 규정을 종합해 보면, 표준적 BBCHP계약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선체용선계약에 ‘소유권취득조건’이 부가되어 있어야 한다. BARECON 2017의 관련 규정에서 이는 용선자가 가지는 선박의 구매에 대한 선택권(Option)이다. 용선자는 약정된 시일에 선박의 구매를 할 것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고, 이러한 선택권의 행사에 따라 선박소유권의 이전이 발생한다. ② 용선자는 선박소유권을 이전받기 위해 약정된 선박의 대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추가적인 금전의 지급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이러한 추가적 금전지급을 완료하여야 선박소유권이 이전된다. 이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선박의 매매가격이라고 할 것이다. 선박소유자는 금융제공액의 원리금 상당을 용선자로부터 회수하여야 할 것이므로, 용선자가 지급하는 금전의 총액이 선박소유자의 금융제공액과 근사할 경우에는 해당 계약의 법적 성질을 BBCHP계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Ⅱ.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질 1. 이 사건 선박의 소유권이전과 준거법 원심은 우리 법제상 소유권유보부매매의 개념을 원용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시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외국적 요소가 있어 국제사법에 따라 준거법을 정하여야 할 것이고, 국제사법 제19조에 따르면 물권의 변동은 매매계약의 준거법과 달리 물권변동의 준거법에 의하여 규율된다. 국제사법 제60조는 선박의 소유권에 관한 사항은 선적국법에 의하도록 특칙을 두고 있다. 이 사건의 경우 당사자 사이에 선박소유권이전의 원인이 되는 선체용선계약의 준거법과 소유권이전에 관한 물권적 합의의 준거법은 달리 결정할 문제이다. 이 사건 선박은 캄보디아에 선적을 두고 있으므로, 설령 원심과 대법원과 같이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질을 대한민국 법상 소유권유보부매매로 인정하더라도, 선박의 소유권이전을 위해 물권적 합의가 필요한지, 나아가 물권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소유권이전행위가 요구되는지 여부는 이 사건 선박의 선적국인 캄보디아국 법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2. 선박 소유권이전을 위한 별도의 소유권이전 행위의 요부와 이 사건 용선계약의 법적 성질 이 사건 선박의 물권변동의 준거법이 대한민국 법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다음 문제가 제기된다. ① 본소 원고는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질을 BBCHP계약으로서, ‘소유권유보부매매’라고 주장하였다. 원심은 소유권유보부매매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하였을 뿐이다. 즉 원심은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질을 소유권유보부매매와 유사할 뿐 소유권유보부매매가 아니라고 판단하였을 뿐이므로,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이 소유권취득조건부 선체용선계약도 아니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BARECON 2017 BBCHP 제1조 및 제2조에 따르면,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 제5조의 ‘선박반선(Re-delivery)’ 및 선박소유권이전에 관한 규정은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이 전형적인 소유권취득조건부 선체용선계약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② 원심은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 제5조에 의하면 용선기간이 만료될 경우 자동적으로 이 사건 선박의 소유권이 원고에게 이전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소유권 이전행위가 요구되므로, 이 사건 용선계약의 법적 성질은 소유권유보부매매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하였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선체용선계약서식인 BARECON 2017은 BBCHP계약상 용선자의 소유권취득을 위해서는 별도의 소유권이전행위를 요구하고 있다. 대법원과 원심의 판시에 따르면, BARECON 2017의 BBCHP의 준거법이 대한민국 법인 경우에는 그 법적 성질을 소유권취득조건부 선체용선계약이 아닌 소유권취득조건이 부가된 선박임대차계약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해석은 당사자의 의사를 왜곡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③ 원심은 소유권유보부매매는 동산의 매도인이 매매대금을 다 수령할 때까지 그 대금채권에 대한 담보의 효과를 취득·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매도인은 이 사건 선박의 소유권이전등기를 매수인에게 해주지 않음으로써 대금채권에 대한 담보 기능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소유권유보부매매의 개념을 원용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시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선박에 대한 공시제도로서 선박등기제도를 두고 있고, 선박에 대한 소유권이전은 등기를 하여야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으므로(상법 제743조), BBCHP계약을 체결한 선박소유자는 용선자의 원리금상환이 완료될 때까지는 자신의 채권의 보전수단으로서 용선선박의 소유권을 보유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이 사건 선박에 대한 등기가 피고 명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 사건 선체용선계약의 법적 성질이 BBCHP계약이라는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결론] 사적자치의 원칙상 BBCHP계약의 계약당사자는 선박가격을 균등분할방식으로 지급할 수도 있지만, 용선기간 중 일정한 시기에 선박가격 중 상당한 액수를 일시불로 지급하기로 약정하는 등 다양한 상환설계를 하는 것도 가능하고, 선박금융 실무도 동일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에서 판례의 태도는 BBCHP계약 및 위 계약을 선박금융의 주된 수단으로 활용하는 선박금융의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정원 교수(부산대 로스쿨)
선체용선계약
선박
소유권유보부매매
이정원 교수(부산대 로스쿨)
2022-07-11
금융·보험
생명보험약관상 심신상실상태의 자살에 대한 보험자면책
Ⅰ 사건의 개요와 판결요지 1. 원심판결(광주지법 2017. 10. 27. 선고 2017나55151) 요지 2004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원고의 딸인 망인은 2006년 10월 학부모의 폭언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고, 2008월 10일 우울증 진단과 함께 약 2달간 치료를 받게 된 후부터 매년 가을 우울증을 호소하여 이듬해 봄까지 월 1회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받아왔다. 망인은 2011년 9월말부터 홍반성 구진 등 피부병과 간수치 악화 등으로 입원·통원 치료를 하다가, 2011년 10월 12일 퇴근 후 집에서 목매어 사망하였다. 이에 원심법원은 망인이 사망 전날 정상적으로 출퇴근하였고, 사망 당일에 특이한 행동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후 늦게 거주지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는 사정만을 들어 망인의 심리상태가 급격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거나 극도의 흥분상태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자살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망인의 사고는 고의에 의한 자살로서 약관상 보험자 면책사유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2. 대법원 2021. 2. 4. 선고 2017다281367 판결 요지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보험계약에서 자살을 보험자의 면책사유로 규정하고 있는 경우에도 피보험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망의 결과를 발생케 한 직접적인 원인행위가 외래의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사망은 피보험자의 고의에 의하지 않은 우발적인 사고로서 보험사고인 사망에 해당할 수 있다. 신체적 및 정신적, 행동적인 변화로 어려움이 지속적으로 심한 경우는 기분조절의 문제가 있는 우울장애라고 할 수 있고, 정신의학에서 우울한 상태란 사고의 형태나 흐름, 사고의 내용, 동기, 의욕, 관심, 행동, 수면, 신체활동 등 전반적인 정신기능이 저하된 상태를 말하며, 이렇게 기분의 변화와 함께 전반적인 정신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를 우울삽화(Depressive episode)라고 하며, 정도가 심한 삽화를 주요 우울삽화라고 하여 주요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로 진단한다.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하루 중 대부분, 그리고 거의 매일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이 관찰될 것, 또는 거의 매일, 하루 중 대부분, 거의 또는 모든 일상 활동에 대한 흥미나 즐거움이 뚜렷하게 저하됨 등을 포함한 9개의 인지, 행동, 신체적 증상을 제시하면서, 위 증상이 포함된 5개 이상의 증상이 2주 연속으로 지속되며 이전의 기능 상태에 비해 변화를 보이는 경우를 주요우울의 진단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주요우울삽화의 발병과 한 해의 일정한 기간 사이에 규칙적인 시간관계가 있을 것 등을 계절성 동반의 주요우울장애의 진단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한국표준질병 사인분류는 우울병 에피소드가 뚜렷하며 의기소침, 특히 자부심의 소실이나 죄책감을 느끼고 자살충동이나 행위가 일반적이며 많은 신체적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를 고도(중증)의 우울증 장애로 본다. 이를 종합하면, 망인은 2006년 학급 내 문제로 우울장애를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겪은 후 매년 10월경을 전후하여 우울삽화가 발생하는 등 망인이 자살할 즈음 계절성 동반의 주요우울장애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원심법원이 자살과 우울증 장애의 관련성에 관한 확립된 의학적 판단 기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망인이 우울증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단정한 것은 면책사유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하였다. Ⅱ. 심신상실 상태에서의 자살과 보험자면책 1. 서 보험사고가 보험계약자 또는 피보험자나 보험수익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생긴 때에는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없다. 한편 생명보험 표준약관 제5조는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에 보험금을 지급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동조 단서에 피보험자가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 특히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된 경우에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살은 고의에 의한 사고로서 보험사고의 우연성과 불확정성에 어긋나고, 자살사고의 경우에 보험금이 지급되면 모럴해저드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선의의 보험계약자에게 손해가 전가되기 때문에 보험자면책사유가 된다. 그러나 피보험자의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쳐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경우에는 의사무능력 상태에서 감행된 사고로서 고의성이 없으므로 보험금을 지급한다. 2. 심신상실 또는 정신질환의 의미 정신질환이란 뇌세포의 손상으로 인하여 비정상적인 소인에 따라 정상적인 판단형성이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의지박약이나 우울 상태, 자살의 기도나 생활능력의 박약과 같은 수준의 정신병적 인격장애 정도는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배제되는 정신질환으로 보기 어렵지만, 심각한 정신착란, 완전한 대취 정도의 명정 상태, 정신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을 정도의 심각한 정서적 우울증 등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정신질환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심신상실이란 심신장애로 사물에 대한 변별력이 없거나 의사를 전혀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심신상실 여부는 의학상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감정을 토대로 법관이 결정해야 할 법적·규범적 문제에 속한다. 2010년 표준약관이 '정신질환 등의 사유'를 '심신상실 등의 사유'로 변경하였는바, 정신질환은 의학적으로 정신장애, 의식장애 또는 정신병으로 한정 해석될 여지가 있는바, 책임능력과 연관이 있는 '심신상실'이란 개념이 더 광범위하게 자유로운 의사배제 상태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아 변경한 것으로 생각된다. 3. 심신상실상태에서의 자살에 대한 증명 심신상실상태에 대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면 법률 지식과 경제적 능력이 우월한 보험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입증의 정도를 완화하여 정신질환의 존재, 그 질환의 상당기간 계속 내지는 중증인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행위 당시 순간적으로 판단능력을 상실한 명정상태 등이 인정되면 자유로운 의사가 배제된 심신상실 상태로 법원이 간주한다. 망인이 시댁과 갈등에 시달렸고 출산 1년 만에 충수절제술을 받는 등 신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졌으며, 사건 당일 술취한 남편이 망인의 뺨을 자녀들 앞에서 때리고, 망인의 멱살을 잡아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망인이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린 사고는 극도의 흥분과 불안한 심리상태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인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하지 아니하고 사망의 결과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대법원 2010. 3. 25. 선고 2009다38438, 38445 판결). 하지만 우울성 에피소드인 진단서를 발급받은 후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것은 발병 시기가 짧았고, 당일 행적, 자살 전에 남긴 유서의 내용 등을 고려해 볼 때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대법원 2010. 3. 25. 선고 2009다38438, 38445 판결). 한편 심신상실 등의 자살에 대하여 법원이 재해요건 중 우연성만을 판단하고 외래성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재해사망을 광범위하게 인정하여 유족보호만을 치중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있다. 즉, 보험금청구권자는 심신상실상태를 증명할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여 법관으로 하여금 확신에 이르게 해야 하고, 현출된 증거에 대한 증거능력과 증명력을 엄격하게 법원이 판단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심신상실 등에 대하여 보험금청구권자가 더 엄격한 증명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Ⅲ. 대상 판결의 평석 망인은 교사로서 학부모 폭언으로 첫번째 우울증이 발병하였고, 그 후 증상이 반복되어 계절성 양상의 재발성 주요우울병장애에 이르렀으며, 그 후 우울증을 호소하다가 2011년 가을 학교업무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차에 우울증이 재발하고 인지왜곡증상이 겹쳐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망인의 계절성 양상의 주요우울증세가 수년간 지속되어 고도(중증)의 우울증세에 해당되어 자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학적 소견과 일치된다. 그러므로 망인의 자살은 스스로 사망을 인식하지 못할 정신질환 상태, 즉 피보험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보험금을 지급하여야 한다는 대법원판결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심신상실 상태의 자살에 대한 보험금지급규정은 남용될 소지가 있는바, 심신상실에 대한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고, 심신상실의 개념을 구체화시킨 객관적 기준을 약관에 명기하는 방향으로 표준약관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최정식 교수(숭실대 법학과)
생명보험
자살
보험자면책
최정식 교수(숭실대 법학과)
2021-11-15
금융·보험
상사일반
보험수익자 변경에 대한 보험계약자 의사표시의 성격
Ⅰ. 서론 보험계약관계는 기본적으로 보험계약자와 보험자 사이의 계약이다. 하지만 보험계약에서는 피보험자의 개념이 있고 또한 인보험에서는 보험수익자의 개념이 존재한다. 이들 사이의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며 계약을 체결하는 보험자가 당사자들을 조합할 수 있다. 손해보험에서는 보험금을 받기로 되어 있는 자가 피보험자이다. 하지만 인보험에서는 그 사람의 신체에 보험을 붙이는 사람이 피보험자이다. 그리고 보험금을 지급받을 자가 보험수익자가 된다. 이때 보험계약을 체결하고 보험료를 납부할 의무가 있는 보험계약자가 보험수익자를 지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그 지정·변경권 행사와 관련하여 분쟁이 자주 발생한다. 이에 이 글에서는 최근의 대법원 판례를 고찰대상으로 삼아 보험계약자의 보험수익자 지정·변경권의 성질, 내용에 대하여 살펴본다. Ⅱ. 대상판결(대법원 2020. 2. 27. 선고 2019다204869 판결) 1. 사안 2016년 12월 2일경 망인은 보험수익자 변경권을 행사하였다. 이로 인해 보험수익자가 피고에서 원고로 변경되었다. 그 사실을 보험자에게 통지하지는 아니한 상태에서 2017년 10월 8일 망인이 사망하였다. 이에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보험금청구권의 양도 및 그에 따른 양도통지절차의 이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제1심(청주지방법원 2018. 5. 15. 선고 2018가단20668 판결)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제2심(청주지방법원 2018. 12. 19. 선고 2018나7420 판결)은 제1심 판결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제1심 판결을 취소한 다음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다. 2. 대상판결 보험계약자는 보험수익자를 변경할 권리가 있다(상법 제733조 제1항). 이러한 보험수익자 변경권은 형성권으로서 보험계약자가 보험자나 보험수익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고 그 행사에 의해 변경의 효력이 즉시 발생한다. 다만 보험계약자는 보험수익자를 변경한 후 보험자에 대하여 이를 통지하지 않으면 보험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상법 제734조 제1항). 이와 같은 보험수익자 변경권의 법적 성질과 상법 규정의 해석에 비추어 보면 보험수익자 변경은 상대방 없는 단독행위라고 봄이 타당하므로 보험수익자 변경의 의사표시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이상 그러한 의사표시가 보험자나 보험수익자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보험수익자 변경의 효과는 발생한다. Ⅲ. 보험수익자 지정과 변경 1. 보험수익자의 지정 또는 변경의 권리 생명보험에서는 보험계약자는 그 사정 여하에 따라 보험수익자를 지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데(제733조 제1항) 이것을 보험수익자의 지정·변경권이라 한다. 보험계약자가 이러한 지정권을 행사하지 아니하고 사망한 때에는 피보험자를 보험수익자로 하고 보험계약자가 이러한 변경권을 행사하지 아니하고 사망한 때에는 보험수익자의 권리가 확정된다. 보험수익자의 지정변경권은 보험자의 동의를 요하지 않고 보험계약자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만 있으면 되므로 형성권이며 단독행위이다. 2. 지정·변경의 대항요건 보험계약자가 계약성립 후에 보험수익자의 지정·변경을 한 경우에는 보험자의 2중지급 방지를 위해 보험자에 대해 그 지정·변경을 통지하지 않으면 이를 보험자에게 대항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상법 제734조 제1항). 통지는 단지 대항요건이므로 나중의 보험수익자는 전의 보험수익자가 받은 보험금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Ⅳ. 독일의 법제와 논의 독일에서도 우리와 거의 유사하게 보험수익자 지정 변경을 이해하고 있다. 즉 보험수익자 지정은 계약체결 시에 이루어질 수 있고 그 이후에 이루어질 수 있다. 보험수익자 지정은 1)일방적인, 2)수령을 필요로 하는, 3)형성권적인 의사표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은 따라서 처분행위이다. 다만 우리와는 다르게 독일에서는 수익자 지정의 의사표시는 수령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수령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내용은 계약법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 보험계약자, 보험자, 제3자에게 있어서 권리를 변경하는 내용은 증빙수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Ⅴ. 해석론과 입법론 1. 해석론 생명보험계약에서 보험계약자의 보험수익자 지정은 보험자에게는 통지하여야 대항할 수 있다. 보험계약자의 보험수익자 지정·변경권이 일방적인 권리로서 형성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이해하는 한 보험회사가 보험수익자를 변경할 경우에는 보험회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약관을 두고 있다면 이는 상법 제663조에 반하여 무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 타인을 위한 보험에서 보험계약을 해지할 때에는 보험증권을 소지하거나 타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상법 제649조 제1항). 하지만 보험계약자가 기존의 보험수익자에서 새로운 보험수익자로 수익자를 변경함에 있어서는 기존의 보험수익자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보험수익자 변경을 보험회사에 통지하지 아니하였다 하여도 객관적으로 보험계약자가 보험수익자를 변경하였다면 그 사실을 보험자에게 증명하고 주장하여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 그리고 통지는 단지 대항요건이므로 나중의 보험수익자는 전의 보험수익자가 받은 보험금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구 보험수익자가 신 보험수익자로 적법하게 변경이 된 이상 신 보험수익자가 보험금청구권자가 되기 때문에 신 보험수익자가 구 보험수익자에 대하여 보험금채권의 양도를 구할 법률상의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 보험수익자는 보험자에게 통지하여 보험금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시는 해석론으로서는 타당하다. 2. 비교대상으로서 독일의 내용과 입법론 독일의 경우에도 우리와 유사하게 보험수익자 지정·변경권을 이해하고 있다. 즉 수익자 지정권은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하는 형성권으로 본다. 다만 독일의 경우에는 우리와 달리 수익자 지정의 의사표시는 수령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보험계약자, 보험자, 제3자에게 있어서 권리를 변경하는 내용은 증빙수단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독일의 법제 및 학설 판례에 의하면 본 사안에서는 대법원 판결처럼 판시할 수는 없고 수익자 변경내용은 무효라는 결론이 될 것이다. 보험자에게 도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독일에서는 우리와는 다르게 보험계약법에서 수인의 보험수익자의 청구금액, 상속인간의 보험금청구비율에 대하여 규정을 두고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수익자 지정·변경권을 형성권으로 보면서도 보험자에게 도달하여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를 참조하여 우리 상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상법 제734조 제1항을 아래와 같이 개정함으로써 수익자 지정·변경을 통지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대항요건이 아닌 내용으로 법률규정에 표현함으로써 민법 제111조가 적용되어 도달주의가 적용되는 것이다. Ⅵ. 결론 타인을 위한 생명보험에서 보험수익자 지정은 법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험료를 출연하고 계약을 관리하는 보험계약자에게 보험수익자 지정·변경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일방적인 권리로서 형성권이다. 만일 보험계약자가 보험수익자를 변경할 경우에는 보험회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약관을 두고 있다면 이는 무효라고 보아야 한다. 타인을 위한 보험에서 보험계약을 해지할 때에는 보험증권을 소지하거나 타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보험계약자가 기존의 보험수익자에서 새로운 보험수익자로 변경함에 있어서는 기존의 보험수익자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지정·변경권을 행사한 경우 보험자에게 통지하는 것은 대항요건이다. 따라서 보험자에게 통지하지 않았어도 적법하게 보험수익자를 변경한 경우에는 새로이 지정된 보험수익자가 보험금청구권자가 된다. 그 결과 신 보험수익자는 구 보험수익자에게 보험금채권의 양도를 구할 법률상의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소송을 제기한 경우에는 그 소를 각하하여야 한다. 독일의 경우에도 우리와 유사하게 보험수익자 지정·변경권을 이해하고 있으며 수익자 지정권은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하는 형성권으로 본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수익자 지정의 의사표시는 수령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독일의 법제 및 학설 판례에 의하면 위의 사안에서는 대법원 판결처럼 판시할 수는 없고 수익자 변경내용은 무효라는 결론이 될 것이다. 수익자 변경의 의사표시가 보험자에게 도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험수익자를 제 때 그리고 제대로 지정하는 것이 생명보험계약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사고는 뜻하지 않게 발생하고 생명보험의 속성상 사망한 후에 보험금이 지급되므로 그 구도를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최병규 교수 (건국대 로스쿨)
보험수익자
보험금
보험계약자
최병규 교수 (건국대 로스쿨)
2021-01-04
금융·보험
민사일반
대리의 본질과 표현대리 및 대리권 남용행위
I. 사실관계와 판시사항 1. 피고 乙은행 ○○지점의 당좌업무 대리 A는 재벌기업 대표이사 B로부터 대가를 약속받고 다른 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선지급하는 방식으로 예금을 유치하여 사업자금으로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원고 甲은 대리인 C를 통해 A와 예금계약을 체결하여 1억 원을 乙에 예치하였다. A는 그 중 100만 원을 입금 처리하고 나머지는 원장에 기재하지 않은 채 B에게 지급하는 등, 4년간 약 1,066억 원을 예치하여 그 중 512억 원을 B에게 제공하였다. 甲은 乙을 상대로 만기 예금액 및 약정이자의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2. 제1심법원(84가합366)과 원심법원(84나2428)은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고, 대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대리권 남용법리를 적용하여 A의 대리행위에 따른 예금계약의 효과를 乙에게 귀속시킬 수 없으므로 乙은 甲에게 예금을 반환할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이 부분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대법원은 A가 乙의 당좌업무 대리인으로서 C와 예금계약을 체결한 것은 권한을 넘어선 대리행위이지만, 甲에게 A의 대리권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으므로,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하여 甲과 乙의 예금계약은 유효하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A는 예금계약을 통하여 甲의 이익을 꾀한 대리권 남용행위를 하였고 甲이 이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으므로, 예금계약에 따른 책임을 乙에게 물을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86다카1004). II. 평석 1. 우리민법 규정과 대리의 본질 (1) 대리의 본질과 관련하여 우리민법은 대리인행위설의 입장이라고 한다. 대리효과의 귀속은 대리인의 대리의사에 따른 법률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송덕수). 나아가 민법 제114조 이하 규정이 대리의 효과의사대로 법률효과가 발생하도록 하며, 특히 제116조 제1항은 우리민법이 대리인행위설을 취하는 실정법적 근거일 뿐만 아니라(곽윤직, 고상룡), 이에 따르면 대리인행위설만 입론이 가능하다고 한다(지원림). 이에 반하여 독일에서 제안된 행위규율분리설은 수권행위와 대리행위를 단일한 하나의 행위로 파악하고, 대리인의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서 ‘행위’ 측면과 본인에 대한 효과귀속으로서 ‘규율’ 측면을 구분하되, 행위 주체는 대리인이지만 규율의 주체는 본인으로, 규율측면이 본질적인 부분이어서 대리효과가 본인에게 직접 발생한다고 설명한다(이영준). (2) 대리인행위설과 행위규율분리설에 따른 법적 취급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이 대리권 남용행위와 표현대리이다. 대리권이 적법하게 수여된 경우 다른 요건이 충족되면 대리효과가 귀속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대리권 남용법리가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대리권이 수여되지 않았다면 대리효과가 귀속되지 않아야 함에도 그 귀속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표현대리이다. 2. 대리권 남용법리에 대한 대리인행위설 및 행위규율분리설의 입장 (1) 대리권을 적법하게 보유한 대리인이 자기 또는 상대방의 이익을 위하여 대리행위를 한 결과 본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대리권 남용행위라고 한다. 이는 대리행위의 요건을 모두 충족한 상태여서 대리효과의 귀속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상대방이 대리인의 배임의도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까지 대리효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상대방의 악의 또는 (중)과실을 근거로 대리효과의 귀속을 차단시키는 법률구성을 ‘대리권 남용법리’라고 한다. 이는 대리권 수여라는 측면에서 유권대리로 취급되어야 하지만 대리효과의 귀속이 차단된다는 측면에서는 무권대리가 된다. 이에 대하여 대리인행위설은 비진의표시의 효과에 관한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를 유추적용하거나 신의칙 내지 권리남용금지원칙 위반의 효과에 따라 대리효과의 귀속을 차단한다. 반면 행위규율분리설은 배임행위를 한 대리인을 무권대리로 취급하여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2) 비진의표시 유추적용설은 대리권 남용행위를 비진의표시의 외양과 유사하게 파악하여 대리행위로서는 유효하게 성립하지만, 대리인의 배임의사를 상대방이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의 취지를 유추하여 대리행위의 효력을 부정한다. 대다수 판례의 입장이다(74다1452, 97다24382, 2008다13838). 한편 권리남용설 내지 신의칙위반설은 대리인의 배임의사를 상대방이 알았거나 알지 못함에 중과실이 있는 경우까지 대리효과의 귀속을 인정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며, 더욱이 상대방이 본인에 대하여 그 효과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한다(강태성, 홍성재, 명순구). 법인의 대표권 남용에 관한 사례이지만 판례 중에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86다카1522, 89다카24360). (3) 행위규율분리설은 대리관계를 대리인의 대리 ‘행위’에 대한 측면과 효과귀속에 대한 본인의 ‘규율’ 측면으로 이해하고, 대리효과 귀속의 본질은 본인과 상대방의 규율에 달렸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대리권 남용행위는 대리권이 있더라도 본인에 대한 대리효과의 귀속이 차단되므로 무권대리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추가적으로 표현대리 규정에 따라 대리효과가 귀속될 수 있다는 입장(손지열)과 배임행위의 명백성을 근거로 구분하는 입장이 있다(백태승). 3. 표현대리에 대한 대리인행위설 및 행위규율분리설의 입장 (1) 우리민법은 표현대리를 대리권수여의 표시(제125조), 대리권의 범위 초과(제126조), 대리권 소멸 후의 대리행위(제129조)로 나누고 있다. 본인이 이러한 각각의 외관을 제공하였으므로 이에 관하여 선의·무과실인 상대방은 대리효과의 귀속을 주장할 수 있다. 표현대리는 대리권이 없다는 측면에서 무권대리이지만, 본인에게 효과가 귀속된다는 측면에서 유권대리로 취급할 수 있다. (2) 대리인행위설에 의하면 표현대리는 무권대리에 속한다(양형우). 우리 판례 역시 명백하게 표현대리가 성립되었다고 하여 무권대리의 성질이 유권대리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83다카1489). (3) 행위규율분리설은 표현대리를 유권대리로 이해한다. 대리의 본질은 본인과 상대방 사이의 규율인데, 표현대리는 본인의 외관 형성과 상대방의 신뢰에 기초하여 본인에게 대리효과를 귀속시키므로 유권대리의 아종이라고 한다. 특히 독일민법에서 인정되는 외부적 수권행위 개념이 유용하다(이영준). 독일민법은 대리권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본인이 대리인에게 직접 대리권을 수여하는 방법(내부적 수권행위)과 본인이 대리행위의 상대방이 될 제3자에게 대리권을 수여하는 방법(외부적 수권행위)으로 나누어 규정한다(§167 Abs. 1). 그리고 외부적 수권행위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대리행위의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170), 대리행위의 상대방에 대한 특별통지와 다수의 제3자에 대한 공고(§171 Abs. 1) 또는 대리권 증서의 교부와 제시(§172 Abs. 1)를 인정하고 있다. 4. 표현대리에 대한 대리권 남용법리의 적용과 판결의 검토 (1) 앞의 판결에서 A는 乙은행의 당좌업무에 관한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 甲과 예금계약을 체결하였다. 乙은행은 그 지점장을 통해 A에 대한 대리권의 외관을 제공하였는데 甲이 이를 신뢰하였으므로, A에게 민법 제126조에 따른 표현대리가 성립하여 甲과 乙 사이에 예금계약이 인정되었다. 이에 더하여 A가 甲에게서 예금으로 교부받은 금전을 횡령하고 甲에게 기준을 넘어서는 이자를 지급한 것은 대리권 남용행위이다. 甲이 이러한 A의 배임의도를 알았으니 대리권 남용법리에 따라 乙은행에 대한 A의 대리효과로서 예금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 이것이 판결의 결론이었다. (2) 대리인행위설은 표현대리를 무권대리로 이해하였고 대리권 남용법리는 유권대리에 관하여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논리적으로 무권대리인 A의 표현대리에 대하여 유권대리에 관한 대리권 남용법리는 적용할 수 없다. (3) 행위규율분리설에 의하더라도 표현대리는 유권대리라고 하면서 대리권 남용법리를 적용하면 A의 동일한 행위가 갑자기 무권대리로 변경되는 기이한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유권대리로 취급된 표현대리가 대리권 남용법리의 적용에 의하여 무권대리가 된다면, 그 무권대리는 다시 표현대리의 요건 충족으로 유권대리가 되는 순환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대리권 남용법리의 적용으로 이론상 무권대리가 되더라도 대리권 남용행위를 한 대리인에게는 실제로 대리권이 존재하므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대리권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대리인행위설에 의하면 A의 행위가 무권대리였다가 유권대리로 바뀌고, 행위규율분리설에 의하면 유권대리였다가 무권대리로 변경되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위 판결이 대리인행위설에 따른 것인지, 행위규율분리설에 따른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A는 乙은행으로부터 수여받은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 甲과 예금계약을 체결하는 하나의 동일한 행위를 했을 뿐인데, 대리의 본질에 관한 두 견해에 의하여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유권대리 또는 무권대리로 혼란스럽게 법적 성질이 결정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정상현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
표현대리
대리권남용
예금계약
정상현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
2020-01-20
금융·보험
상사일반
선하증권상 미국 COGSA 지상약관은 준거법의 분할지정이다
- 500달러 책임제한은 유효함 (대법원 2018.3.29.선고 2014다41469판결) - I. 사실관계 甲 운송인은 미국 화주와 미국에서 한국까지 유화화물을 운송하는 항해용선계약을 체결하였다(준거법은 영국법). 甲은 용선자인 송하인에게 선하증권을 발행하여주었다. 선하증권에는 용선계약을 편입한다는 내용과 책임제한에는 미국법을 적용한다는 지상약관이 아래와 같이 존재하였다. 만일 이 선하증권이 선적항 또는 하역항(양륙항)이 미국 해상화물운송법(COGSA)(중략)이 시행되는 지역 내에 있다는 이유로, 1936 미국 COGSA(중략)가 적용되는 권원증권인 경우에, 이 선하증권은 COGSA(중략)에 따라 효력을 가지고, 위 법률 규정은 이 선하증권에 편입된 것으로 간주되며, 이 선하증권의 어느 부분도 위 법률 규정에 따른 운송인의 권리나 면책의 포기 또는 책임의 증가로 간주되지는 아니한다(선하증권 후문) 화물이 손상되자 선하증권을 취득한 수하인에게 보험금을 지급한 보험자는 보험자 대위권을 행사, 운송인에게 손해배상청구를 하였다. 이에 피고 운송인은 지상약관은 준거법의 부분지정이라고 주장, 책임제한액은 미국 COGSA의 포장당 500달러가 된다고 하였다. 원고는 이는 실질법적 지정으로서, 500달러 책임제한액수는 영국법상 운송인의 책임제한액보다 낮아서 화주를 불리하게 하므로 영국법상 강행규정에 위반하여 무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원심(부산고법 2014. 5. 22. 선고 2012나10751)은 피고의 주장을 수용하여 톤당 미화 500달러로 운송인의 책임을 제한하였다. 원고는 상고하였다. II. 대법원의 판시내용 국제계약에서 준거법 지정이 허용되는 것은 당사자 자치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선하증권에 일반적인 준거법에 대한 규정이 있음에도 운송인의 책임범위에 관하여 국제협약이나 그 국제협약을 입법화한 특정 국가의 법을 우선 적용하기로 하는 이른바 지상약관이 준거법의 부분지정(분할)인지 해당 국제협약이나 외국 법률 규정의 계약 내용으로의 편입인지는 기본적으로 당사자의 의사표시 해석의 문제이다. 일반적 준거법 조항이 있음에도 운송인의 책임범위에 관하여 국제협약을 입법화한 특정 국가의 법을 따르도록 규정하고, 그것이 해당 국가 법률의 적용요건을 구비하였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운송인의 책임제한에는 그 국가의 법을 준거법으로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당사자의 의사에 부합한다. 원심은 그 판시와 같은 이유로 아래와 같이 판단하였다. 가) 이 사건 선하증권 전문에 따라 이 사건 해상운송계약상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규정한 조항이 선하증권에 편입되었으므로, 선하증권의 일반적 전체적 준거법은 영국법이다. 나) 이 사건 선하증권 후문은 명시적으로 운송인인 피고의 책임범위를 미국 COGSA에 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 준거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운송인의 책임제한에 관하여 특정 국가의 법으로 정하도록 하였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당사자의 의사는 운송인의 책임제한에 미국 COGSA를 준거법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 이 사건 선하증권 후문의 해석상 이 사건 화물의 선적항이 미국 프리포트 항이고 미국 COGSA는 “선적항이나 양륙항이 미국 내에 있는 모든 국제해상화물운송계약에 적용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선하증권에 기한 피고의 책임제한에 관한 준거법은 미국 COGSA이다. 미국 COGSA를 준거법으로 적용할 경우에 앞서 본 적용요건 이외에는 법정지 국가의 법에서 선적항 소재지 법률을 준거법으로 적용하여야 하는 등의 다른 요건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미국 COGSA상 책임제한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요건도 충족되지 아니한다. 라) (중략) 마) 피고의 손해배상책임제한에 관한 준거법인 미국 COGSA에 따라 피고의 책임은 톤당 500달러로 제한된다. 원심의 판단에 (중략) 잘못이 없다. III. 평석 선하증권에는 법률관계를 처리하기 위한 일반준거법규정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준거법과 관련된 지상약관이 있어서 둘 사이의 관계가 문제된다. 1. 선하증권의 일반적 준거법 선하증권 이면에 명시적으로 준거법을 한국법 혹은 영국법으로 명기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용선계약 하에서 선하증권이 발행된 경우에는 용선계약의 준거법을 선하증권에 편입하는 경우도 있다. 항해용선계약에서 정한 준거법이 정당하게 선하증권에 편입된 것으로 원심에서 판단되어 영국법이 선하증권의 법률관계를 정하는 일반준거법이 되었고 대법원에는 다투어지지 않았다. 2. 지상약관 선하증권에 들어있는 지상약관은 통상 다른 규정에도 불구하고 지상약관에 있는 내용이 우선한다는 취지의 약정이다. 본 사안에 추가된 지상약관은 미국 COGSA를 운송인의 면책과 책임제한에 적용한다는 취지였다. 이 지상약관은 다른 준거법 약정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준거법을 각각 따로 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 준거법약정에도 불구하고, 책임제한 등과 관련하여서는 지상약관이 부분적으로 준거법으로 지정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준거법의 분할이 일어난다. 우리 국제사법도 이를 인정하고(제25조 제2항), 관련 대법원 판례도 있다(2016. 6. 23. 선고 2015다5194판결). 둘째는 지상약관은, 준거법은 그대로 있으면서, 당사자들이 외국 법률 규정을 계약 내용으로의 편입(실질법적 지정)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반적 준거법의 아래에서 책임제한에 대하여만 적용할 법률을 특별히 약정한 것이 된다. 이 약정은 일반적 준거법상의 강행규정에 위반할 수 없다. 3. 본 사안의 경우 선하증권상 일반준거법은 용선계약이 편입되어 영국법으로 결정되었다. 지상약관을 저촉법적 부분지정으로 보면 지상약관의 효력에 따라 미국 COGSA의 책임제한액 500달러가 적용되게 된다. 반면 실질법적 지정으로 보면 이는 영국법의 강행규정에 위반되어 무효가 될 여지가 있게 된다. 미국법에 의하면 책임제한액이 미화 500달러이지만 영국법에 의하면 그 포장당 미화 1000달러 혹은 Kg당 2SDR로 책임제한액수가 대폭 상향되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실질법적 지정으로 지상약관을 보면 미국 COGSA의 책임제한액 500달러는 일반준거법인 영국법의 강행규정에 위반하므로 책임제한액수는 영국법 하의 훨씬 높은 금액(최소 약 1000달러)로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운송인인 피고 측은 첫째와 같이 준거법이 분할이 일어난 것으로 인정받아야 책임제한액이 포장당 500달러로 인정받을 수 가 있게 된다. 원심과 대법원은 본 사안에 외국적 요소가 있는 만큼 우리나라 국제사법의 규정에 따라서 준거법을 정하였다. 국제사법 제24조 제1항의 당사자 자치의 원칙에 따라 선하증권에 나타난 당사자의 의사를 탐구하였다. 대법원은 준거법의 부분지정을 인정하여 일반적 준거법외에 책임제한에 대한 준거법이 별도로 지정된 것으로 보면서 준거법의 분할지정이 가능하다는 원칙을 설시한 다음, 원심에서 제시한 근거를 모두 인정하였다. 결국 미국법 지상약관이 있는 경우 이는 준거법의 부분지정으로 되었고, 피고 운송인이 주장하는 책임제한액이 유효하게 되었다. 대법원이 설시한 여러 근거 중 논점과 관련하여 적합한 근거는 위 ‘나)’이다. 책임제한에 관하여는 미국 COGSA를 준거법으로 적용하기로 하는 약정이 있다고 하였다. 준거법의 부분지정을 인정한 대목이다. 지상약관을 통하여 미국 COGSA의 책임제한제도의 적용을 당사자가 합의한 것은 쉽게 인정이 된다. 그렇지만, 그 합의는 강행규정의 적용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니 만큼, 강행규정이 적용되어 합의가 무효가 될 수 없도록 하는 준거법의 분할지정까지 하였다는 근거로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원심은 지상약관의 말미에 있는 “선하증권의 내용이 책임제한액수의 증가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에 주목하여 실질법적 지정이라면 영국법 강행규정에 의해 영국법의 훨씬 높은 책임제한액수가 적용되므로 당사자가 지상약관을 삽입한 의도에 반한다고 하였다. 대법원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특정국가의 법'이 지정된 경우는 준거법의 분할이 인정이 된다는 취지로 설시하였다. 특정국가의 법률이 아닌 것이 지정된 경우, 예컨대 1924년 헤이그규칙이 지정된 경우에는 실질법적 지정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석광현, '해사국제사법의 몇가지 문제점', 한국해법학회지, 제31권 제2호, 102면 참조), 헤이그 규칙하의 책임제한약정은 일반준거법의 강행규정위반이므로 무효가 되는지 의문이다.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함에 있어 준거법의 지정형태가 준거법기준이면 저촉법적 지정이고, 효과기준이면 실질법적 지정이라는 견해도 있다(이성웅, 선하증권상 지상약관에 의한 준거법의 분할지정, 통상법률 제2008-2, 105면). 본 사안의 미국 COGSA 지상약관은 책임제한에 대하여만 준거법이 지정된 것으로 보아 운송인의 책임과 의무는 일반적 준거법인 영국법이 적용되었다. 공정한 기회원칙에 위배된다면 운송인은 책임제한을 할 수 없고 이것이 인정된 미국의 판례도 많이 있지만 다투어지지 않은 점은 아쉬운 점이다. 불법행위책임의 준거법은 운송계약의 경우와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김인현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선하증권
보험금
COGSA
화물운송
김인현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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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교수(선장, 고려대 해상법 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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