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약품의 제조물책임에서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의약품의 결함 또는 제약회사의 과실과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약품 제조과정은 대개 제약회사 내부자만이 알 수 있을 뿐이고, 의약품의 제조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로서 일반인들이 의약품의 결함이나 제약회사의 과실을 완벽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 따라서 환자인 피해자가 제약회사를 상대로 바이러스에 오염된 혈액제제를 통하여 감염되었다는 것을 손해배상책임의 원인으로 주장하는 경우, 제약회사가 제조한 혈액제제를 투여받기 전에는 감염을 의심할 만한 증상이 없었고, 그 혈액제제를 투여 받은 후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되었으며, 그 혈액제제가 바이러스에 오염되었을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면, 제약회사가 제조한 혈액제제의 결함 또는 제약회사의 과실과 피해자의 감염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울 수 있도록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손해의 공평·타당한 부담을 그 지도 원리로 하는 손해배상제도의 이상에 부합한다. 여기서 바이러스에 오염되었을 상당한 가능성은, 자연과학적으로 명확한 증명이 없더라도 혈액제제의 사용과 감염의 시간적 근접성, 통계적 관련성, 혈액제제의 제조공정, 해당 바이러스 감염의 의학적 특성, 원료 혈액에 대한 바이러스 진단방법의 정확성의 정도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제약회사는 자신이 제조한 혈액제제에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등 피해자의 감염 원인이 자신이 제조한 혈액제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여 추정을 번복시킬 수 있으나, 단순히 피해자가 감염추정기간 동안 다른 회사가 제조한 혈액제제를 투여 받았거나, 수혈을 받은 사정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그 추정이 번복되지 않는다.
2. 이 사건 감염 원고들은 피고 甲 회사가 제조한 혈액제제를 투여받기 전에는 감염을 의심할 만한 증상이 없었고, 위 피고가 제조한 혈액제제를 투여받은 후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되었으며, 위 피고가 제조한 혈액제제는 HIV에 오염되었거나 오염되었을 상당한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 피고가 제조한 혈액제제의 결함 또는 위 피고의 과실과 위 감염 원고들의 HIV 감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정되고, 한편, ●●●, □□□ 등 감염혈액을 제공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유한 HIV의 유전자 정보와 감염 원고들이 보유한 HIV의 유전자 정보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일부 감염 원고들이 HIV 오염여부를 알 수 없는 외국산 혈액제제 또는 수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위 추정이 번복된다고 할 수 없으므로, 위 피고가 제조ㆍ공급한 이 사건 혈액제제와 감염 원고들의 HIV 감염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판결에는 혈액제제 제조자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증명책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한 사례
3.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채권에 있어서 민법 제766조 제2항에 의한 소멸시효의 기산점이 되는 ‘불법행위를 한 날’이란 가해행위가 있었던 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손해의 결과가 발생한 날을 의미한다. 그런데 감염의 잠복기가 길거나, 감염 당시에는 장차 병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될 것인지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을 일률적으로 감염일로 보게 되면, 피해자는 감염일 당시에는 장래의 손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하여 청구하지 못하고,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서는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청구하지 못하게 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경우에는 감염 자체로 인한 손해 외에 증상의 발현 또는 병의 진행으로 인한 손해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손해는 증상이 발현되거나, 병이 진행된 시점에 현실적으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