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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2-2)
박솔잎 기자
2022-08-2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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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채색(彩色) ⑫ 범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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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과 지검에 강력부가 설치된 어두웠던 시절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 및 강력부장 - Ⅱ

(1989. 3. 29. - 1991. 4. 18.)


 

2년 여에 걸친 범죄와의 전쟁 이야기를 하려 한다. 

 

1980년대 말은 강·절도 사범을 비롯한 단발적인 사건이 이어지고 도시 뒷골목에는 무허가 음식점들이 교통 혼잡을 야기할 정도였고, 각종 퇴폐업소가 난립해 조직폭력배가 이런 업소를 장악해 자금원으로 활용하며 기생하던 시대였다. 한 마디로 무법이 판치던 시대였다. 이렇게 된 것은 경찰력이 체제 유지를 위한 공안 수요에 대부분 충당돼 민생치안이라는 경찰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이 ‘범죄와의 전쟁’이란 말은 대검 강력부장 시절인 1990년 10월 13일 제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담화에 처음 등장하는 용어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기 전 내가 대검 형사 2부장으로 부임했을 때 김기춘 검찰총장이 취임한 지 이미 4개월 뒤였다. 대검에는 공안사범 합동수사본부와 민생침해사범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공안 합수부는 이철규 변사사건이 끝나고 해체됐으나, 민생합수부는 전국으로 전선을 확대하며 강화됐다. 그러나 사령부인 대검에는 형사 2과라는 하나의 부서만 있는 실정이었다.

 
합동수사라고는 불렀으나, 일선에서 일을 하는 건 오직 검·경뿐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합수부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범정부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이후 중앙에 검·경, 문교부, 건설부, 보사부, 노동부 관계자 등이 참여하는 전국 수사지도협의회가 구성됐다. 협의회는 법령에 근거한 협의체가 아니라 당면한 현안에 대응하기 위한 임시적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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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강력부장 시절 민생치안 관계기관 회의. 오른쪽부터 노태우 당시 대통령, 허형구 법무부 장관, 김기춘 검찰총장, 김두희 법무부 차관, 최상엽 대검찰청 차장검사
<제공=송종의 장관>

 

검찰에서도 검찰총장 주재로 검사장 회의를 통해 강력 수사 의지를 천명하고, 회의 직후에는 불법시위 현장에 투입돼 중상을 입은 전투경찰대원 위로금 전달도 있었다. 민생은 어지러웠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청사진을 마련하기엔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수시로 총장에게 보고해 응급조치를 취하다 대구지검 소속 김태현 검사를 파견받고, 또 다른 검사를 차출해 급한대로 임시 기획단을 만들어 대처했다.

 

이후 대검에서 열린 전국 검사장 회의에서는 민생합수부 설치와 각 지검 수사부의 활동 방향, 조직폭력배 전담수사반 편성 및 운영 등에 대한 지시가 각 지검에 전달됐다. 또 일선 검찰청 민생치안 범죄 단속 전담반을 관장할 대검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직제개편이 추진되었다. 

 
당시 대검 형사 1부와 형사 2부는 발생된 범죄의 성격에 따라 그 사물관할이 달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단속을 하더라도 범죄 내용을 구분해 형사 1·2부에 따로 보고하다 보니 일선 검찰에 대한 지휘체계의 혼란도 있었다.

 

일선 검찰도 이와 같아 청에 따라 지역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하는 경우에도 어떤 청은 형사부장, 어떤 청은 특별수사부장이 책임자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것은 응급조치에 불과할 뿐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단속의 효율성 또한 크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일선 검찰청 특별수사를 지휘하는 것처럼 대검의 특별 지시 및 그에 따른 적절한 지도와 감독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체제였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선 검찰청에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범죄 단속을 전담할 부서의 설치가 반드시 필요했다.

기구의 신설과 인원의 확충이라는 것이 검찰만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원의 확충은 총무처의 소관 사항이고, 이에 따른 예산의 뒷받침은 기획재정부의 전담 소관 사항이다. 중앙행정기관인 이 두 부처가 그 필요성에 따라 검찰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사전에 청와대 등 정책 담당 부서와의 협의가 필수적이다.


대도시 지방검찰청에 강력부라는 전담부서를 신설하는 어려운 작업이 시작됐다. 대검 형사 2부의 명칭을 강력부로 바꾸는 것과 함께 추진됐으나 우선 급한 대로 대검찰청 사무기구만을 개편했다. 개편 직후 우선 서울, 부산, 광주 등 세 곳만이라도 지검에 강력부를 설치하라는 검찰총장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

이왕 조직을 확대하는 김에 세 곳이 아니라 서울, 인천, 수원, 대구, 부산, 광주지방검찰청 등 6개 검찰청에 강력부 설치를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검 강력부가 생긴 직후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이 일은 그 이듬해인 1990년 4월에 가서 매듭을 짓게 되는데, 4월 12일 드디어 총무처와의 협의가 끝났다. 위의 대도시 6대 지검에 강력부를 신설하고, 강력부 산하에 6개의 강력과를 두며, 인원은 80명 수준으로 조정하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요청했던 검찰서기관 6명은 그 요청대로 반영됐으나 사무요원으로 요청한 검찰사무관과 하위직 검찰공무원 156명 인원은 80명 수준으로 하는 내용의 직제 개편안이 총무처에서 확정됐다. 6대 지검에 강력과를 설치하여 서기관 6명, 사무관 9명, 주사 13명, 주사보 17명, 서기 14명, 서기보 10명, 기능직 12명, 합계 81명을 증원하는 내용의 개정령이었다. 그 직후 기획재정부와 예산 협의가 끝나 4월 24일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개정령이 차관회의를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법대 동기 동창생인 총무처 행정조직국장이 내게 많이 시달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내각에서 나와 함께 각료로 등용돼 나의 법제처장 재직 중 내각의 개편으로 새로 총무처 장관에 임명된 심우영이 그 사람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란 말의 뜻을 그도 실감했을 것으로 믿는다. 이 같은 직제개정은 가히 획기적이었으나, 수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머지 검찰청 본청에 강력부와 강력과가 신설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니 나의 아쉬움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80년대 말 도시마다 퇴폐업소 등 난립
조직폭력배도 활개…곳곳이 무법지대
대검에는 ‘형사2과’ 한 개 부서만 존재
‘지검에 전담부서 신설’ 난관 속 작업착수
서울 등 6개 검찰청에 강력부 신설 매듭

서울지검 초대 강력부장에 관심 집중 속
‘특별수사 1부장’ 심재륜 검사 강력 천거
더불어 현재 직책도 겸할 수 있도록 요청
유례없는 ‘강력부장 겸 특수1부장’ 탄생
대검서 추천 6명 모두 지검 강력부장으로


이렇게 1990년 5월 7일자로 법령이 개정돼 시행됨으로써 고등검찰관의 인사이동이 뒤따랐다.

 

신설된 강력부가 어떤 위상을 가진 부서인가는 그 시대 상황과 직무 내용에 따라 결정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자리에 가는 사람이 어떤 평가를 받는 사람인가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서울지검의 초대 강력부장이 누구로 임명되느냐 하는 것은 전 검사들의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인사 발령 직전에 내가 검찰총장에게 진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지검의 초대 강력부장 6명의 인선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고, 특히 서울지검의 강력부장은 갈 만한 사람이 그 자리에 갔다는 평가가 있어야 하므로 이 부분만은 나의 청을 꼭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서울지검의 초대 강력부장으로 천거한 사람은 당시 특별수사 제1부장이던 심재륜 검사였다. 그는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의 민생합수부장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특수통 검사였다. 앞으로 강력부가 그 위상을 지키고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부서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전 나를 서울지검 특별수사 1부장에서 전주지검의 차장검사로 전보시킨 김석휘 전 법무부 장관의 인사 방침과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본청 특별수사 1부장의 자존심이 어떤 것인지는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므로 심 부장검사가 혹시 섭섭해할지 몰라 한 가지 조건을 검찰총장에게 더 요청했다. 본직 발령을 특수 제1부장이 아닌 강력부장으로 인사를 단행하되, 그가 현재까지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특별수사 1부장직을 겸할 수 있도록 동시에 겸직 발령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검찰총장의 내락을 받은 후 내가 직접 심재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특별수사 1부장직을 이미 오래전에 역임한 대선배였으므로 그가 이런 나의 인사 방침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당시 6대 지검에서 민생합수부장의 직을 수행하고 있었거나, 대검 강력부에서 천거한 6명의 부장검사가 각 지검의 초대 강력부장으로 임명됐다.


단, 심재륜 부장검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내려갔다. 새로 서울지검에 강력부장실이 마련된다면 사무실은 본직 발령인 강력부장실로 옮겨 사무를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그는 우리나라 검찰사상 유례가 없는 서울지검의 강력부장 겸 특별수사 1부장이 됐다.

각 지검의 민생합수부에서 조직폭력배의 단속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 나는 검찰총장에게 특별히 다음과 같이 진언한 적이 있었다.


이 조직폭력배들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시작되면 그 담당 검사들을 모함하는 내용이 반드시 법무 검찰 수뇌부에 들려올 것이다. 이들이 검사들의 비위 사실을 들먹거리면서 좌천을 요구하는 사태가 예상되고, 그래도 수뇌부가 이에 초연한다면 그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영전 청탁이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검사들을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책략이다. 이런 일은 불을 보듯 뻔하게 예상되므로 법무 검찰 수뇌부는 절대로 어떤 모함이나 청탁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건의였다.

그 당시 조직폭력배들은 이미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범죄의 현장에 출몰하는 일이 거의 없이 조직을 장악하여 범죄 행각을 벌이고 있었으며, 이 자금줄을 바탕으로 정치권 인사의 후원자로서 암묵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많은 정황을 검찰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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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검찰총장은 그 직을 수행하는 동안 나의 이런 간곡한 진언이 왜 필요하였던 것인지 실감했을 것이다.

 

이 조직폭력배들의 소탕 기간 중 그 총책임자인 나도 이런 사정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때로는 눈과 귀를 막아 가며 직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검사들에 대한 모함과 비방에도 불구하고 검찰 지휘부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의연한 자세로 부하 검사들을 믿고 격려하면서 그들의 철저한 보호자가 된 것은 자랑스러운 우리 검찰의 생생한 역사이다.

 


<정리=박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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