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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2-4)

    3부 채색(彩色) ⑫ 범죄와의 전쟁

    박솔잎 기자 desk@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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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난받던 마약 수출국이 세계공인 마약 청정국으로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 및 강력부장 - Ⅳ

    (1989. 3. 29. - 1991. 4. 18.)

     

    '범죄와의 전쟁'은 조직폭력배 뿐만 아니라 마약사범에 대한 전쟁이기도 했다. 1980년대 국제적으로 마약 남용과 불법 거래가 크게 성행해 1987년에는 유엔 총회에서 6월 26일을 마약퇴치의 날로 정했다. 국내에서도 각성제인 메스암페타민(히로뽕, ice) 사범이 급증하면서 전 대통령의 자제와 유명 인사들까지 남용한다는 소문이 도는 등 큰 사회문제가 됐다.


    당시 세계 3대 마약은 헤로인, 코카인과 메스암페타민이었다. 헤로인을 수출하는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의 태국, 버마, 라오스와 코카인을 수출하는 콜롬비아 등 남미의 국가들과 함께 메스암페타민을 수출하는 한국은 마약수출 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특히 일본 대표들은 자기 나라에 밀반입되는 메스암페타민의 70% 이상이 한국산인데 한국은 단속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마약청도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서부 지역에 밀반입되는 메스암페타민의 거의 모두가 한국산이라면서 성의 있는 단속을 강력히 요청했다.


    정부는 위와 같은 국내외 사정을 고려해 1989년 2월 보사부 소속 마약감시원 57명을 검찰로 이체하면서 대검찰청 형사 제1부에 마약과를 창설했다. 그 직원들을 전국 검찰청에 분산 배치하고, 각 청에 마약 전담검사가 지명돼 수사체제를 갖췄다. 이 마약과가 강력부로 소속돼 내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마약과는 메스암페타민 문제를 단시간에 해결하기 위해서 남용 사범보다 공급 조직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하는 방안을 택했다. 한편으로는 대만에서 수입되는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의 밀반입을 차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제조 유통 조직을 검거하는 대책이 수립됐다.

     

    한국도 ‘히로뽕’ 수출국으로 지목받아
    1989년 대검 형사1부에 마약과 창설
    국내 제조·유통조직 검거 대책 수립
    거물급 잇단 검거로 유통조직 붕괴
    일본서 적발된 한국산 1990년 0%로

    마약 단속 성공사례 국제적으로 알려져
    태국·러시아·영국 등 방문 자문도 응해
    국제적 마약단속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
    마약 단속 실무자 국제협력회의도 창설
    ‘특별연수회’서 美마약청 감사패도 받아


    그 이전 10년 동안 검찰과 경찰에서 검거된 적이 있는 메스암페타민 제조와 유통업자들의 조직 계보도가 만들어져 전국 마약 전담검사에게 배포되고, 이들에 대한 내사를 개시했다. 계보도에 나타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아직도 제조와 유통에 관여하고 있는 사실이 적발되면서 중요 혐의자들이 속속 구속됐다. 부산 지역 메스암페타민의 대부 최재도, 마약왕 이황순도 구속됐고, 또 서울 지역의 대표적 제조자였던 윤재성은 사망했으나 그 부인이 피터팬 아동복을 생산하면서 검찰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고 있는 사실이 발각돼 구속됐다.

     
    제조와 유통 조직이 붕괴되면서 한국에서 메스암페타민 품귀 현상이 일어나 가격이 크게 뛰어올라 일본에 밀반출됐던 것이 한국에 역반입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일본에서 적발되는 한국산 메스암페타민이 1989년에는 12%로 격감하고, 1990년에는 0%가 됐다. 그 후 10년 이상 한국산 메스암페타민이 일본에 반입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적발되지 않아 0% 행진을 계속하는 참으로 경이로운 수사 성과를 이뤄냈다. 1991년의 유엔 보고서에도 한국이 단기간에 마약 단속을 성공시킨 국가로 기록됐다. 메스암페타민 수출국으로 비난받던 대한민국을 2년 만에 마약 청정국으로 만들어 낸 것은 마약 전담 검사들의 사명감과 열정 때문이었다.


    폭력조직이 마약 거래를 자금원으로 삼으면 통제 불능의 수준으로 조직이 커지기 마련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군과 대치하는 정도에 이르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직폭력배와 함께 마약 공급 조직까지 진압한 것이다. 두 조직의 연계를 미리 차단한 매우 희귀한 성공 사례가 되어 국제적으로 큰 칭송과 부러움을 받게 됐다. 범죄와의 전쟁이 승리한 성과로서, 대검 강력부의 창설 목적을 1차적으로 실현해 낸 마약전담 검사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검찰의 성공적인 마약사범 단속 실적이 연이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노태우 대통령은 마약 퇴치 유공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직접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내가 1990년 9월 10일 강력부장 재직 시에 받은 황조근정훈장이 그중의 하나다.

     
    한국이 이처럼 뛰어난 마약 단속 성과를 이룬데 힘입어 마약과장 유창종은 1990년 10월 아직 미수교 상태인 중국의 북경에서 개최된 유엔 마약법집행기관장회의에 참석해 부의장으로 뽑혀 활약했다. 심지어 야당이던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지시로 1990년 11월 평민당 마약퇴치위원회가 구성되고, 이 위원회가 주최하는 마약 퇴치 세미나에 마약과장이 참석해서 발표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국의 마약 단속 성공 사례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외국에서의 초청과 자문요청이 늘어났다. 유 과장은 국내 주재 외국 대사관과의 회의와 유엔 회의 참석을 이용해 성공 사례를 설명한데 이어 태국 마약청과 러시아 내무부 마약단속국을 방문하고, 영국 외무성 초청으로 여러 지역의 마약사범 단속 기관을 방문하며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으로 검찰에서는 유 과장을 '유 대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는 내가 대검 형사 제2부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미 형사 제1부의 마약과장이었으며, 내가 강력부장직을 마친 이후에도 그 직책을 수행하다가 나의 대전지검장 재직시인 1992년에야 비로소 그 직을 떠나 서울지검 남부지청의 특수부장으로 전보됐다. 마땅한 후임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약과장 재직기간은 3년 6개월이나 된다. 1993년 3월, 내가 대검 중앙수사부장에서 서울지방검창청 검사장으로 부임할 당시의 인사발령으로 그는 서울지방검찰청의 제5대 강력부장이 됐다.

     
    마약 단속과 관련해서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한국 검찰이 국제적인 마약 단속 네트워크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은 대만에서 제조한 뒤 메스암페타민은 한국에서 제조하고, 소비는 일본과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삼각의 유통구조였다. 한국의 제조 조직이 붕괴된 이후에 원료는 전과 같이 대만이 공급했으나 완제품 제조 장소는 중국과 필리핀 그리고 북한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소비는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 이뤄져 관련국들의 협력 없이는 제대로 단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메스암페타민 가격이 폭등하게 되자 남미의 각성제인 코카인이 대체 마약으로 일본과 한국에 밀반입되기 시작해서 국제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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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대검 강력부 주관으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검찰 마약수사요원 특별연수 기념촬영.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송종의 당시 강력부장,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 뒷 왼쪽 첫번째 유창종 당시 마약과장.

     

    국제협력 증진을 위해 마약과는 1989년부터 한국 주재 외국 대사관 직원들을 불러 분기별로 국제협력회의를 개최했다. 1990년부터는 각 나라 마약 단속 조직의 실무책임자들까지 참석하는 확대 국제협력회의(ADLOMICO)를 창설했다. 첫 확대 국제협력회의는 1990년 6월 제주도에서 개최됐고, 이때만 해도 한국·대만·일본·미국 등 4개 나라의 대표와 한국의 관련 부서 정도만 참석했다. 하지만 그 뒤 참석 국가도 많이 늘어나고, 유엔 마약 관련 기구와 인터폴 그리고 각국의 장관급 최고 책임자들까지 참석해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처음에는 마약과장 혼자 사회를 보면서 주재하던 회의에 대검 강력부장이 개회식에 참석해 격려하고, 그 후 검찰총장이 개막식에 직접 참석해 격려하는 회의로 격상됐다. 내가 강력부장을 떠난 뒤에도 계속 발전해서 최근 유엔에서 가장 성공적인 마약 단속 국제협력회의로 성장하고, 한국은 아·태지역 마약단속의 명실상부한 주도국이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으니 오직 검찰 후배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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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법무부 마약청에서 대검 강력부장에게 보낸 감사패 <제공=송종의 장관>

     

    미국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의 마약청(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에서 보내온 감사패가 내게 아직 남아 있다. 대검 강력부 주관으로 1989년 11월 6~17일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검찰 마약수사요원 특별연수가 있었다. 미국 마약청의 교관 5명이 검찰의 마약수사요원 30여 명에게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코카인 등을 소개하고 선진 마약 수사 기법과 경험을 전수하는 교육이었다. 본격적인 교육 전날인 11월 5일 나는 주관 부서의 책임자로서 교관을 포함한 참석자 전원을 위해 오찬을 주재하며 난생처음 영어로 격려사를 해보았다. 11월 17일의 수료식에는 김기춘 검찰총장,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 등도 참석했고, 교육 참여자들에게는 수료증이 수여됐다. 미국 마약청에서는 위와 같은 교육 개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나의 이름을 동판에 영문으로 새겨 감사패를 보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이름이 잘못됐다. 그 이름은 나의 이름이 아니라 '유 대사'의 이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변호사법 개정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고 김택현 대한변호사협회장께서 내게 보내주신 감사패를 수십 년간 보관해오다가 현 이종엽 대한변협회장에게 역사적인 기념물로 다시 반환해 변협에 기증한 것처럼 미국 마약청장에게 이를 역사적인 유물로 다시 돌려드리는 일이 생기면 좋으련만 과연 내 생전이나 사후에 이런 일이 있을런지 알 수 없다.


    범죄와의 전쟁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이 겪은 이 어두운 역사가 있었음을 나의 생전에 알려 두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보존해 온 모든 자료를 소상하게 검토한 다음,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며 이 글을 썼다. 우리나라의 어떤 정사(正史)에도 없을 내용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



    <정리=박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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