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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7-1)

    4부 낙관(落款) ⑰ 장관이란 호칭을 남겨준 마지막 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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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 마지막 국무회의 소묘


    법제처장 -Ⅰ

    (1996. 12. 20. - 1998. 3. 3.)


     

    내가 법제처장에 임명된 경위를 간략히 적어 둔다.

    임명 2일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 양촌면사무소 직원이 밤나무 산으로 황급히 나를 찾아와 청와대에서 급히 연락해 달라는 전화가 있어서 검사님이 계실 것 같은 양촌리 영농조합법인으로 갔다가 이 산에 계실 것이라 해서 찾아왔으니 속히 청와대로 전화하시라고 말하며 그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이 직원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산꼭대기 부근에까지 달려와서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전한 말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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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길로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직원이 적어 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그 전화에 대고 하는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의 내각을 개편하기 위해 입각 당사자들에게 모두 통보하였는데, 오직 당신만이 연락이 되지 않아 내각의 명단을 며칠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면서 어디에 다니기에 집에도 없고, 연락도 되지 않는가? 내가 당신을 법제처장으로 임명하려 하니 그런 줄 알라. 김 대통령께서는 불과 30초도 걸리지 않은 이런 말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잠시 머뭇거릴 틈도 없이 그 직을 수락한 꼴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말투로 보아 당시 매우 급한 상태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시급히 차를 몰아 상경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중언부언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취임하는 날 아침,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법제처로 돌아와 취임식을 치렀다.

    법제처는 정부조직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국무회의에 상정될 법령안·조약안과 총리령안 및 부령안의 심사와 그 밖에 법제에 관한 사무를 전문적으로 관장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으로 설치된 중앙행정기관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사바세계의 야단법석 같은 법무·검찰과는 달리 법제처는 집현전 학사의 고담준론 토론장 같은 직장이었다. 시급하고 중대한 현안이 있더라도 통상적인 업무영역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고, 차분하게 대처하면 모두 해결이 가능한 업무였다, 무슨 기발한 착상으로 업무혁신을 꾀할 필요가 없었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행정부처였다.

    나는 대부분 전임자의 업무 처리가 크게 잘못되었거나 그 당시의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이미 이루어진 기존 질서 내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내가 법제처장으로 재임하면서 추진한 업무 내용은 대개 이런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업적이라고 내세울 것은 전혀 없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일의 성패는 그 사람 됨됨이에 따라 결판나는 것이므로 기관장인 내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사였다. 그 이후 일의 성패는 대개 예산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어서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내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다. 법제처장은 국무총리 산하에 있는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그 위원회의 운영을 주관할 책임이 있다. 법제처의 행정심판국이 그 운영의 주무 부서이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 상정되는 행정심판사건은 그 숫자도 만만치 않거니와 때로는 여러 차례의 심판 절차를 속행하면서 결론을 내려야 할 중요한 사건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민사·상사·형사·행정 각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어야만 그 사건의 처리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행정심판위원은 위 각 법률 분야의 전문가가 위촉되어 국무총리로부터 임명장을 받게 된다. 법제처장은 내각의 각료로서 중앙행정기관장이므로 이런 심판사건의 장기간 심리에 관여할 충분한 시간을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면사무소 직원이 밤나무 산으로 찾아와
    청와대로 속히 전화하라며 연락처 전해
    바로 전화했더니 김대통령이 직접 받아
    ‘법제처장으로 임명 통지’ 30초간 통화
    이틀 뒤 청와대에서 임명장 받고 취임

    1998년 2월 YS 정부 마지막 국무회의
    정무직인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 보수
    ‘장관급과 차관급의 중간으로’ 개정 제안
    수정의견 타당하다는 총리 설명 뒤 가결
    새 내각 구성 늦어 DJ 취임 1주일 뒤 퇴임


    행정심판은 재판과 다름없는 것인데, 그것도 어느 한 법률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의 법률 지식 없이는 그 심판에 관여하여 적절한 결론을 낼 수 없는 것이 그 본질이다. 한두 번 그 심판사건의 심리를 맡아 보니, 법제처장이 어떤 때는 온종일도 모자라 밤늦게까지 이 어려운 송사에 관여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행정심판을 법제처장이 직접 주관하여 집중적으로 심리한다 해도 결론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이 심판에 관여하는 행정심판위원들이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심판을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므로 이 심판위원을 제대로 골라 위촉하는 것이 행정심판의 적정성을 담보하는 지름길이다. 정부 측의 당연직 위원을 제외한 심판위원으로 각계의 명망 있는 인사 중 풍부한 재판 경험과 법률 지식을 겸비한 분들을 심판위원으로 모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실감한 것이다. 이리하여 행정심판위원만은 각계의 의견을 들어 삼고초려 끝에 유능한 변호사, 학자 등을 모셔 왔다.

    정부의 당연직 위원인 법무부 법무실장, 내무부 기획관리실장, 경찰청 차장,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을 제외한 민간인 행정심판위원으로 임명된 변호사분들은 노승행, 김학세, 이보환, 이건웅, 서정우, 이진강, 황산성 등 7명이었고, 대학교수는 김철용, 강희갑, 홍정선, 성낙인, 김윤성 등 5명이었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권의 인수 작업에 착수하면서 제일 먼저 정부 조직 개편 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3명의 위원이 위촉되었고, 김광웅 교수 등 9명을 구성원으로 하는 실행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에 이미 작은 정부를 표방하였으므로 정부조직을 개편하되 장관 중 몇 자리는 반드시 줄여야 하는 엄중한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 그들이 공식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국무총리 산하의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국가보훈처 등 4개의 중앙행정부처가 이미 제1차 축소 또는 폐지 대상이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마련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심의할 제187회 임시국회가 1998년 1월 15일 개최되었다. 2월 5일에 국회 법사위에서 법제처 개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법제처 기능의 개편과 법제처장의 직급을 하향 조정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한 중요한 문제점 네 가지를 지적하면서 장시간에 걸쳐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마련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내용을 수정의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도 우리나라 정부 조직 개편의 역사에 큰 문제를 남긴 내용을 국회의 기록으로 남겨 두고자 하는 내 집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의결된 개정안에 따라 결국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의 직급이 장관급 정무직이 아닌 차관급 정무직으로 격하되고, 총무처와 공보처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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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법제처장 초청 간담회 기념사진(1997. 12. 5) 
    앞줄 왼쪽부터 이양우, 이선중, 문홍주, 정진우, 김영균. 뒷줄 왼쪽부터 최상엽, 한영석, 송종의, 김종건, 황길수, 김기석 
    < 사진=송종의 장관 제공>


    다음 국무회의에 관한 기억 몇 개를 적는다.

    나의 법제처장 재임 중 3번의 개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사정이었으므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말기에 이르러는 1년 이상 장관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 내각의 24개 부처 중 통일원, 외무부, 국방부, 공보처, 법제처 등 5개 부처만이 1년 이상 장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의 임기 중 개최된 100여 회가 넘는 국무회의 중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국무회의는 몇 번 없었다. 그 이외에는 모두 국무총리가 의장인 국무회의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의 조찬, 오찬을 겸한 회의는 여러 번 있었으나 헌법상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무회의의 개최 상황은 이와 같았다.

    1998년 2월 24일 아침,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회의가 개회되었다. 문민정부의 모든 각료가 참석한 문민정부의 고별 국무회의로서 이 국무회의는 나에게 아주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게 됨에 따라 행정 각부의 조직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의 공포안건과 행정부 각 기관의 직제 51건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국무회의였다.

    이 국무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나는 고건 국무총리님을 찾았다. 행정의 달인이란 별명답게 그는 국민의 정부가 마련한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안 중 법제처 부분의 문제점을 물론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즉석 안건 하나를 상정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상정할 안건의 내용과 의결주문의 요지를 미리 보고하여 국무총리의 양해를 구했다.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법제처장이 정부조직법 개정법률 공포안건의 제안 설명을 하여 이 안건이 의결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 각부의 직제 51건이 뒤이어 상정되었다. 총무처 장관의 제안 설명이 끝난 다음, 이 안건에 대한 의결 전에 나는 발언의 기회를 얻어 이 안건에 대한 즉석의 수정안건을 상정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수정 내용은 행정자치부 및 그 소속기관 직제 중 공무원 보수규정에 정무직인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의 보수를 장관급 정무직과 차관급 정무직의 중간급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공무원의 직급은 이 공무원 보수규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한 수정안건의 제안 취지는 국회 법사위에서 발언한 내용과 같았다.

    어느 국무위원이 이 안건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였겠는가? 나의 제안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께서는 고건 국무총리의 의견을 타진하였다. 그 안건의 수정의결이 타당하다는 국무총리의 설명이 끝난 뒤 그 수정안건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이리하여 국민의 정부 출범 직전, 법제처장과 국가보훈처장의 직급이 장관급과 차관급 사이의 정무직으로 확정되었다.(2017년 국가보훈처는 장관급 기관으로 환원됨)

    대통령이 바뀌었으나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의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여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지 못한 채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그달을 넘겨 3월 3일에 가서야 비로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나는 본의 아니게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1주일간이나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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